주전자를 내리고 마루 한켠에 놓인 작은 상 위의 컵을 가지고 와 보리차물을 가득 따랐다. 배도 고팠고 목도 말랐다. 컵을 두 손으로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나는 캑, 하고 기침을 쏟았다. 가까스로 컵을 마루에 내려놓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보리차가 지나치게 뜨거웠던 것이다. 그 순간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아이 씨발” 하고 욕이 터져 나왔다.
글을 쓰고 싶은 순간엔 그 특유의 모드가 있는 것 같다. 그 모드를 만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찾아오는 순간도 있다.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처음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느꼈던 순간. 안채 할머니의 마루에서 뜨거운 보리차에 입안을 데었던 바로 그 순간. 홧홧거리는 입안의 통증과는 관계없이 몸에서 약간 힘이 빠지며 몽롱해진 한 순간.
글쓰기 모드의 필요조건이라는 게 있을까. 금방 생각나는 건 일단 날씨가 너무 더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나 《닥터 지바고》의 유리 지바고를 상상해보면 좋겠다. 날씨와 소설은 누가 뭐래도 분명 상관관계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또 너무 배가 불러도 안 되고 배가 너무 고파도 안 된다. 배가 부르면 전복성을 상실하고 배가 고프면 꼬르륵거리는 소리 때문에 집중을 못 한다.
그리고 이것 또한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고 사견이지만 혼자 있을 때보다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 더 잘 써진다. 누군가 글을 쓰는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 척추를 똑바로 하고 노트북을 뚫어져라 바라보게 된다. 다만, 디스크를 예방하려면 의자는 좋은 걸 써야 한다.
그다음 조건은 의자보다도 그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깊고 깊은 내장 속까지 복수심, 배신감, 허무 따위의 감정들로 꽉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기본적인 건 만성 정맥 기능부전 현상처럼 혈관 여기저기가 커다란 슬픔으로 인해 꽉 막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슬픔, 그건 몸속을 흐르는 혈액처럼 내장되어 있어야 할 아주 베이스에 속하는 사항이다.
이런 조건들과 더불어 한두 시간은 복수심으로, 또 한두 시간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 또 한두 시간은 다른 사람이 보고 있다는 자각에 의해 세 날의 칼을 번갈아 내밀 듯 하면 글은 써진다. 과연 그럴까? 그러면 글이 써질까? 그리고 그렇게 쓴 글의 수준은 늘 괜찮을까?
그때, 할머니네 집 마루에서 뜨거운 보리차로 혀를 데었을 때 나는 비로소 처음으로 하나의 문장이 저절로 떠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나의 영원한 쟈~앙, 나는 지금 칼에 베인 듯 아픕니다.” 그 문장이 좋은 문장인지 나쁜 문장인지 그건 알 수 없었지만 글이 떠오르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기쁨이 컸다.
그 문장을 여러 차례 곱씹고 허공에 대고 발음하고 또 일기장에 옮겨 적었다. 고통이 스스로 변화를 일으켜 다른 감정으로 전이된 것 같았다. 나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문장에 대한 경이감에 몸을 떨며 혼자서 거듭 다짐을 했다. 글을 쓰리라! 글을 쓰리라! 죽어도 쓰리라.
그해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한밤중에 책을 읽다 보면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담요를 어깨에 뒤집어쓴 채 골목으로 나가면 비원 담벼락 위의 검은 허공으로 줄지어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볼 수 있었다. 어느 집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느라 그릇들이 부딪치는 소리, 추위에 커다랗게 매달렸던 고드름이 떨어지는 소리, 아이들을 야단치는 엄마들의 목소리를 죄다 덮으며 천천히 끈질기게 눈이 내렸다.
늦게 귀가하는 사람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는 듯이 헛기침을 하며 골목을 지나갔다. 누군가 길에 떨어뜨리고 간 장갑 한 짝, 담벼락 아래 뒹구는 구두 한 짝을 손에 들고 미친 여자처럼 골목을 싸돌아다녔던 나. 한밤중에, 그 골목길을 나처럼 많이 서성거렸던 사람이 또 있을까. 수첩과 볼펜을 머리맡에 두고 섬광처럼 지나가는 꿈을 모두 다 기록하겠다고 벼르던 나. 나처럼 심야 전기를 많이 이용한 사람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