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회색 담장이 쳐진 계동의 골목길을 걸었다. 하늘에서부터 파란색 눈발이 날렸다. 몹시 기분 나쁜 파란색이었다. 낮은 담장 아래 깃든 짙은 어둠을 따라 타박타박 걸었다. 흐린 불빛이 새어 나오는 한옥들 사이의 허공으로 서툰 바이엘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을 가리지 않은 집들 앞에 가 서서 발뒤꿈치를 들고 안을 들여다봤다.
뿌연 창을 통해 작은 밥상을 가운데 놓고 모여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남학생의 뒷모습, 그 뒤에 앉아 내복을 입은 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는 중년의 아줌마 얼굴도 보였다. 입김을 한껏 불어넣으면 창이 한순간 동그랗게 환해지며 공부하던 학생이 놀라 휙, 얼굴을 돌려 나를 쳐다본 것 같아 흠칫 뒤로 물러섰다. 어떤 집 창문 안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양말을 신지 않은 다리 네 개와 하반신만 보이고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서로를 향해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이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걸어 나오다 보니 큰길 쪽이었다. 분식집 앞에 걸어놓은 커다란 솥 위에서 흰 김이 솟아올랐다. 뭔가에 들떠 큰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는 회사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너무 추워서 자꾸 몸이 떨렸다. 어딘가 적당한 곳으로 들어가 커피라도 마시며 쟝에게 쓴 일기를 읽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돈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해 등을 돌린 채 자기네들끼리 즐겁게 웃고 자기네들끼리 좋아죽겠다고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외감이 온몸을 내리눌렀다.
그때 나에게 있는 거라고는 삭이지 못하는 분노와 불안 그리고 가난뿐이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남자 주인공처럼 “아빠” 하고 달려드는 아이들을 향해 진짜 마음과는 다르게 심한 매질을 가하는 것처럼 알 수 없는 가학의 본성이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걸 느끼기까지 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아이들을 보기만 하면 짜증을 내는 남자 주인공, 그가 결국 아이들을 심하게 때리고 마는 심정에 충분히 공감했다. 너희들과 너희 엄마를 사랑하지만 함께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나야말로 맞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너무 화가 나니 일단 너희들이 좀 맞아라. 내 화가 풀릴 때까지. 그런 심정이었을까?
나는 낮게 가라앉은 계동 골목을 걷고 또 걸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터덜터덜 이 길을 왔다 갔다 했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계동 길을 걸었다. 답답한 내 마음을 풀어주기에 사실 계동 골목은 너무 아기자기하고 정겨웠다.
걸어도 걸어도 참을 수가 없었다.
발이 자꾸 미끄러지고 숨이 거칠어졌다. 참다못해 좁은 길옆으로 쌓아 올려놓은 눈을 맨손으로 뭉쳤다. 어디에 던지면 이 세상이 끝장날까, 나는 눈을 뭉쳐 아무 곳으로나 마구 던졌다.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했고 옆으로 자빠지기도 하면서 계속 눈을 뭉쳐 던졌다. 한참을 던져도 기분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슬픔은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이불집이 있는 코너를 돌았을 때부터 글짓기 교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적지 않은 열기가 느껴졌다. 책도 낸 적이 없으면서 자기들끼리 김 작가, 이 작가, 정 시인, 김 시인이라고 부르며 신세한탄에 빠진 허접한 작가 지망생들이 모두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누구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글짓기 교실 앞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대문을 열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는 본채로 들어갔다. 거실에 놓은 연탄난로 위에서 보리차 주전자 뚜껑이 저 혼자 흔들리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할머니, 주전자 내려놓을까요? 막 끓는데.” 덜컹거리며 열린 마루문 사이에 대고 말했지만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나는 방문을 살짝 열었다. 낄낄대며 저희들끼리 웃어대는 텔레비전만 혼자 돌아가는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목침을 베고 잠들어 있었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발끝에 엎드려 두 팔에 머리를 괸 채 자고 있었다. 나는 방으로 살짝 들어가 할머니의 얼굴 밑에 깔린 노트를 꺼내 접었다. “할머니 똑바로 자.” 할머니는 내 말에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나는 이불을 꺼내 할머니를 덮어주고 형광등 불을 껐다. “너 손이 왜 그리 차냐. 마루에 보리차 좀 마셔.” 힘없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