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전 사건 때문에라도 나는 정말 다 큰 뒤에 동전 따위나 훔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그때 김 작가의 친구 남편이 나에게 했던 말이 내 운명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최초의 칭찬이었던 건 사실이다. 어떤 경우 칭찬이 사람을 우매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쨌든 김 작가가 내가 쓴 일기장을 보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닉네임을 써야 했고 일기장은 철저하게 감춰야만 했다. 쟝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소원이라고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 그에 관해 쓴 일기장을 안전하게 보관할 나만의 방을 갖고 싶다는 것.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참 유치하고 어렸던 것 같다.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연인들의 방도 아니고 고작 일기장을 보관할 방이 필요하다니.
한때 여관 갈 돈도 없는 가난한 연인들 사이에 “사랑을 나눌 우리들만의 방이 필요해요”라는 말을 유행시킨 폴란드의 소설가 마렉 플라스코의 《제8요일》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방이 필요해, 방이 필요해”라고 떠들고 다니면 왠지 근사해 보였던 것 같다. 발음하기 몹시 힘든 이름을 가진 아무 대책 없는 청춘남녀가 사랑할 수 있는 방을 갖고 싶어했다. ‘8요일’이라는 건 자신들이 사랑할 수 있는 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날을 의미했다. 두 사람이 바르샤바를 떠도는 며칠 동안의 사랑 이야기, 아니 세상과의 싸움에서 진 젊은 청춘들의 패배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난 너무 어려서 그와 동침할 방까지는 아직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고 단지 내 방, 나만의 공간, 그게 아니라면 안전한 금고나 열쇠가 달린 책상 서랍, 아니면 급할 때 일기장을 넣어 허공에 띄워 보낼 수 있는 애드벌룬만이라도 있었으면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것을 편지나 보내고 답장이나 해주면 되는 줄 알았던 여드름 천지의 애송이, 그게 바로 나였다.
처음에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왔다. 글짓기 교실의 문을 밀고 손에 든 군고구마나 과자 같은 것을 높이 치켜들고 우리를 향해 보여주곤 했다. 마치 못된 어른이 못된 짓을 하기 전에 어린애들에게 과자를 주는 것과 비슷했다. 그래도 어쨌든 그가 글짓기 교실에 들어오면 좁고 어둡던 실내가 급속히 환해지며 주변의 칙칙했던 벽마저도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일주일에 세 번씩 왔다. 그리고 며칠 지나면서부터는 거의 매일 와서 글짓기 교실의 저녁 강습 시간을 독차지했다. 그가 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시간이 몹시도 빨리 지나갔다. 나의 하루는 그가 찾아오는 순간에 시작되어 그에 관해 일기를 쓰는 한밤중에 정점에 올랐고 다시 그가 오는 저녁이 되어서야 새날이 시작됐다. 아마 그때 누군가 하늘 위에서 계동 골목을 위성사진으로 찍었다면 작은 글짓기 교실이 있던 골목 쪽에만 붉은색 열기가 모여 달아올라 있는 걸 봤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를 처음 의심하기 시작한 건 그가 들고 있는 볼펜 때문이었다. 그는 늘 아무것도 쓰지 않은 흰색 노트를 펴놓고 볼펜을 든 채 김 작가와 얘기를 나눴다. 뭔가 노트에 끼적거리는 필체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내 욕망을 그는 좀처럼 채워주지 않았다. 그의 파란색 모나미 볼펜은 늘 그의 손에만 들려 있었다. 어쩌다 그가 종이 위에 점을 찍고 뭔가를 쓰려고 하면 나는 눈에 힘을 주고 그의 노트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아무것도 쓰지 않고 얌전히 볼펜을 내려놓았다.
그날도 나는 쟝을 기다렸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얇은 블라우스 때문에 오들오들 떨면서 그에게 줄 편지를 시몬느 베이유의 책갈피에 숨긴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쟝은 오지 않았고 약속이 있다고 외출한 김 작가도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그들이 밖에서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이상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 온몸에 힘이 빠지고 가슴이 아팠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자꾸 오줌이 마렵고 척추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정말 누가 내 가슴을 여러 차례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욱신거리며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