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은 그날 나를 아주 멀리까지 데리고 갔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탔고 시장통과 상가가 밀집해 있는 낯선 길을 걸었다. 시장통에서는 뭔가를 사먹자고 했고 우리는 순대와 튀김을 먹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던 아주 멀고 험한 곳인 동시에 매우 흥미로운 곳, 그때까지 내가 전혀 가본 적이 없는 청량리 역 광장 쪽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데리고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슨 불빛 아래 벌레들이 모이듯 무대에 모여 서 있었다. 들어간 지 한 시간쯤 되었을 때부터 나는 사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술 탓인지 다만 거기 있던 그 순간만큼은 몸이 너무 가벼웠고 천장 위에 붙은 조명들이 너무나 예뻤다.
생일파티를 하고 박수를 치고 쿵쾅거리며 음악이 흘러나왔다. 저 멀리서 남자애들에 둘러싸인 R이 나를 넘겨다보며 입 속으로 담배를 들여가는 모습이 보였다. “바보 같은 것. 촌스러운 것. 한심한 고삐리.” R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R은 소문처럼 면도칼을 씹고 유흥업소에 다니는 진짜 불량학생인 것이었다.
그 당시에 가장 인기가 있던 댄스 여가수가 나와 신나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나비처럼 가벼워 보였고 고통이라고는 없는 얼굴이었다. 한동안 가수 생활이 뜸한 채 온갖 루머에 시달리던 그 여가수가 어느 날 텔레비전에 나왔다. 나는 잔뜩 늙어 있는데 그 여가수는 그때 그 나이트클럽의 무대 위에 있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저 사람들은 뭘 먹는 걸까.’ 난 혼자서 중얼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나는 어느 한 순간부터 머리를 쳐들지도 못하고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화장실도, 나이트클럽 정문도 모두 다 기어서 나왔다. 어떻게 해서 집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사람들 목소리, 덜컹거리는 자동차 문, 차가운 바람기가 몸에 묻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기한 건 R이 어떻게 우리 집을 알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웬 날라리 같은 지지배가 널 데려왔더라.” 김 작가가 아침잠을 깬 나에게 말했다. “정말 날라리 같았어?” 내가 김 작가에게 물었다. 그때서야 내가 R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게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그후로도 며칠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쿵쾅거리는 나이트클럽 음악 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나는 술로 인한 지독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때 나는 깨달았어야 했다. 내 몸 속에서는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가 전혀 없다는 걸. 그러니까 내 부모 중 한쪽은 술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고 그게 아버지 쪽일 수 있다는 걸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그걸 깨닫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닥에서 기어야 했는지, 난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였다.
혹독한 겨울이었다. 어느 날 글짓기 교실 너머의 유리창이 신기하게 통째로 환해지며 키가 크고 검은 스웨터를 입은 멋진 남자가 문을 밀고 안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실례합니다.” 얼마나 멋진 말이었는지. 아무도 글짓기 교실의 문을 열면서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글짓기 교실 안으로 들어왔고 큰 키 때문에 글짓기 교실 천장이 아주 가까워 보였다.
방 안에 있던 김 작가는 부스스한 머리를 만지며 나오다가 금세 표정을 바꿔 화사한 얼굴로 변했다. “아, 어떻게 오셨어요? 날씨도 추운데. 들어오세요. 얼른 들어와 앉으세요.”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의자에 앉았고 별로 볼 것도 없는 글짓기 교실 실내를 천천히 둘러봤다.
나는 김 작가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커피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타닥거리며 파란 불꽃이 일고 이내 붉은 불꽃이 활활 타올라 스테인리스 주전자 아래 표면으로 삽시간에 퍼졌다. 나는 수납장에서 커피 병을 내리고 커피 잔을 더운 물로 헹궈냈다. 그 모든 일을 하는 내 손등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