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 나는 편지를 쓰는 일에 조금은 지쳐 있었다. K와도 관계가 안정되어 조금은 동어반복적인 얘기만 오가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편지라는 형식이 갖는 한계를 알아버린 것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나는 어느 날 밤부터 그 커피숍에 앉아 김 작가가 쓰던 원고지를 가져가 소설이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왜 시가 아니고 소설이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냥 내 몸 속에 흐르던 차가운 강물이 시킨 일이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원고지 오십 매쯤 되는 소설이었는데 내가 일하던 충무로의 생맥줏집이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이었고 악독한 사장과 시골에서 올라온 종업원들이 주요 인물들이었다. 차별대우와 저임금에 시달린 종업원들이 작당해 사장을 커다란 술통 속에 빠뜨려 죽인다는 게 큰 줄거리였다. 사실 맥줏집 사장은 그리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할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쓰고 보니 별로 재미가 없었다. 경험만으로는 글을 쓸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교훈이라면 교훈이었다. 그러나 그 소설은 어쨌든 내가 쓴 최초의 소설이었고,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초라한 내 글쓰기 역사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어느 날 김 작가는 책 한 권을 들고 들어와 호들갑을 떨었다. “야 봐봐, 이 여자 봐봐. 유명한 작가 J잖아. 어제 요 앞에서 사람들 만나다 봤거든. 이 동네에 오래 살았다네. 내가 이 여자 소설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 작간데.”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김 작가가 들이민 사진을 들여다봤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밤마다 동네 커피숍에 앉아 차를 마시는 그 후줄근한 여자였다. 매우 멋질 거라고 예상했던 작가라는 사람들은 후줄근한 스웨터 차림에 고등학생인 나도 가는 커피숍에 앉아 책이나 읽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여자가 썼다는 책 제목들, 소설 제목들을 오래 들여다봤다. 그렇게 후줄근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글은 어떤 것일까 매우 궁금했다. 최소한 그 여자 작가의 소개글 안에는 내가 아는, 내가 사용하는 쉬운 단어들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막, 빙하, 한밤의 드라이브, 주홍빛 물고기’ 등등. “이렇게 못 생긴 여자도 멋진 글을 쓰는데 난 얼마나 한심하니. 아직 제대로 데뷔도 못하고.” 그날 밤 김 작가는 혼자서 맥주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며칠 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시험 점수가 나온 것이다. K와 나는 종로에서 만나 인파로 가득 찬 거리를 비집고 걸었다. 조용히 울고 싶었다.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은 꿈도 못 꿀 점수였다. K의 얼굴도 역시 나처럼 좋지 않았다. 우리는 해가 지도록 종로 거리를 뱅글뱅글 돌았다. 지방 대학이라도 가게 되어 집을 나갈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김 작가에게는 돈이 없었다. 나는 왜 그런지 그 순간 K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자기 학대가 필요한, 뭔가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좀더 터프하고 세상을 좀 아는 친구가 필요한 법이었다. K는 슬픈 얼굴로 돌아갔고 나는 한 시간쯤 늘 R이 서 있곤 하던 종로서적 건물 앞자리에 그림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예쁜 패딩 점퍼를 입은 R이 걸어왔다. 그녀가 입술에 방방하게 바람을 넣은 뒤 나에게 말했다. “씨발, 머리꼴 하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