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목에 올가미를 씌우는 모양이다.
밧줄인지 고래심줄인지, 내 전신의 힘으로 매달리고 발버둥 쳐도 꿈쩍도 하지 않을 줄이, 허공에 나를 고깃덩이처럼 대롱대롱 매달아 놓을 줄이, 목울대에 와서 닿는다. 내 숨을 끊어놓을, 긴장과 공포로 역류하는 피와 전율을 일순간에 멈춰버릴, 체념과 분노로 이미 반쯤 막힌 호흡을 완전히 막아버릴, 사형의 도구가 목울대에 와서 고정되는 것이 느껴진다. 목을 감은 올가미, 그 튼실한 감촉이 느껴진다. 뭔가 아직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둘 중에 하나라 했다.
목에 줄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이거나, 칼로 목을 베는 참수형이라고 했다. 참수용 칼이 초승달처럼 생겼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노란 초승달이 내 목을 베고 지나가는 악몽을 수도 없이 꾸었다. 예상과 달리, 나는 교살형을 선고 받았다. 목에 밧줄 끝의 올가미를 걸고 단숨에 잡아당겨, 목을 졸라, 죽이는 형이다. 참수하면 목을 베어 신체를 훼손하지만, 교수하면 신체라도 온전히 지킬 수 있다 했다. 왕의 손길이 닿았던 몸을 훼손할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한때 왕에게 사랑받던 여자에게 주는 마지막 배려였다.
왜 서두르지 않는 것일까.
검은 두건이 머리부터 목까지 덧씌워져 있다. 앞을 가로 막은 공포와 어둠, 두 손은 뒤로 묶였고, 목은 위쪽에서 내려온 줄에 탄탄하게 묶여 있다. 이 자세는 … 내 몸의 굴곡을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집행인들은, 힐끗힐끗, 은밀한 눈으로 내 몸을 더듬고 있을 것이다. 긴장과 공포로, 내 긴 목은 하늘을 향해 치켜들려 있고, 유두(乳頭)는 공포와 흥분으로 교합의 그때처럼 급하게 오르내리고 있다. 그들에게 이렇게 가까이에서 왕의 여자를, 마음껏, 눈으로 심지어 손으로 더듬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성욕과 죽음이 동행한 이 짜릿한 순간을, 아랫도리를 타내려 가는 본능적인 전율을 가능한 연장하고 싶은 것이다. 내 손을 묶을 때도, 내 발목을 묶을 때도, 심지어 내 목에 밧줄을 걸 때도, 남자들의 손길은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어쩌면 내 옷을 전부 벗겨보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내 알몸 말이다.
세상 사람에게 발가벗겨진 채 웃음거리와 조롱거리가 된, 내 알몸 말이다.
샘에 고인 물이 땅속으로 지맥을 이루며 갈라지듯, 궁궐에서 흘러나온 차갑고도 단맛 나는 내 이야기는 궐 전체를 돌아 궐 밖으로, 그 다음 도성 밖으로, 그리고 팔도강산으로 점점 흐르고 스며들어, 메마르고 쩍쩍 갈라진 땅에 물길이 돌아 흐르듯, 고달프고 지친 백성들이 잠시나마 일손을 멈추고 서로 시시덕거릴 정서적 맥이 되어 주었다. 이런저런 모양으로 흘러 다니는 이야기를 신선한 생수처럼 마시면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생의 고달픈 순간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의 권위와 위신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왕의 여자가 궐 밖 남자에게 연서를 보냈다가 들켰다는 이 기막힌 사건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거대한 가마솥처럼 들끓고 있었다.
읍! 그 남자가 누구인가.
백성들은 생에 잊지 못할 사형 현장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진실이나 고통 따위는 아랑곳없이, 떠버릴수록, 부풀릴수록, 상상할수록 그들은 행복해졌고, 입만 열면 서로가 서로의 입과 귀가 되어주어 나라 전체가 막힘없이 통(通)하고 있었기에, 그 교감의 절정을 경험할 현장을 백성들은 고대하고 있었다. 그 바람들이 무시된 채, 사형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 이 떠들썩한 화제의 주인공이 죽어가는 현장에 운 좋게 참여하게 된, 사형의 왕명을 유시하기 위해 파견된 낭청(郎廳)의 도사(都事)와 의금부 나장이나 사형집행인들은 그래서 조금 더 시간을 끌며, 다른 사람들에게 신나게 전해줄 어떤 이야깃거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에 올가미를 걸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마지막 순간에 누구를 찾았는지, 내 말 내 행동, 그 무엇이든지 기막힌 이야깃거리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형 선고 유시가 끝나자, 오른쪽 귀 옆에서, 침착하고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위로의 말들이 많지만, 이처럼 아름답고 끔찍한 위로가 있을까. 죽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살아있을 시간도 그리 오래지 않으리라는 뜻이 아닌가. 나름 진심이 들어 있는 목소리였지만, 그 말 때문에 여태 간신히 유지하던 마음의 균형이 한순간에 깨질 뻔했다. 나는 이 다급하고 황망한 상태를 이기려고, 입술을 깨물며, 적을 생각한다. 내 마음의 적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적, 바로 나를 생각한다. 내 죽음으로 평온을 되찾을 사람들에게, 공포에 휩싸여 내가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며 죽어갔다는 말을 전하게 되면, 나는 죽음보다 더 비참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
순간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소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은 내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는 모양이다. 휘파람 소리처럼, 가늘고 긴 산새의 울음소리가 지나간다. 마지막 말을 생각해볼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설령 있다한들, 이제 와서 어떤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지만 그들은 침묵으로 채근하고 있다. 마지막 말! 검은 천이 얼굴을 감싸고 있어 호흡이 점점 어려워지고, 공포 때문에 묶인 두 다리가 오징어 다리처럼 말려 올라가는 느낌이다.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솟구쳐 올가미에 눌린 목젖을 간신히 통과한 무엇인가가 입안에서 터져 나왔다.
백팔 글자라고 전해주오.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저절로 터져 나온 말이었다. 감추고자, 마음 속 깊이 닫아두었으나, 비밀 스스로 발효하고 팽창하여 뚜껑을 열고 나온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 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말은 전혀 달랐고, 뱉어내고 나니 마치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난 느낌이다. 뱉어낸 말을 주워 담고, 다른 말을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선전포고는 이미 효력을 발생하여, 다른 사람의 머리보다 내 머리에 더 강하게 새겨졌다. 백팔 글자라고 전해주오. 이번에는 작정을 하고 같은 말을 뱉었다. 두 번째 말하고 나니, 마치 오래전부터 이 마지막 말을 준비해온 느낌이 든다. 순간, 내 가슴에 품고 있는 비밀이 마음의 균형을 잡아주는 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 번째 다시 묻는 말에, 나는 같은 대답을 했다.
백팔 글자라고… 전해주오.
순간, 몸이 조금 느슨해지면서 평온함이 찾아 든다. 오랫동안 비밀을 혼자 간직하다가 세상에 터뜨려 놓은 내 몸은 비로소 해방감에 휩싸이고 있다. 나라 전체를 들끓게 했던 한 여인이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 남긴 말, 처음에는 왕에게만 전해지겠지만, 이 현장에 있었던 자들의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전해질 것이고, 그 은밀함의 속성 때문에 더 왕성한 번식력을 지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옮겨질 것이고, 그래서 갈수록 그 말의 의미를 찾으려는 궁금증이나 악한 의도 혹은 선한 의지들이 창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무엇인가를, 찾아낼 것이다. 숨겨진 여러 가지 정황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왕이 침묵한다 한들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이다.
사형수와 사형집행인!
비로소 바늘구멍만한 숨구멍이 열리며,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내 마지막 말이 막혔던 내 숨을 되살리고 있는 모양이다. 왜 진작 그 말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다 털어놓았다면 세상이 나를 이렇게 희롱하진 못했을 텐데. 하지만 늦지 않았다. 내 마지막 말은 세상에서의 내 위치를 바꾸어놓고 말 것이다. 세상이 나를 심문하고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리어 세상을 희롱할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삶이 항상 불공평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내 마지막 말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다. 나는 사형수이지만, 사형집행인이 된 것이다. 칼자루가 바로 내 손에 있다. 이 사실을 왜 진작 몰랐을까, 죽는 순간에는 그 누구나 진실의 칼자루를 쥘 수 있는 것을! 내 몸은 처형되더라도 내 마음은 그 누구도 처형할 수 없다.
찰나에 몸이 공중으로 쑥 부양, … 쭉 아래로 매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