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 뭐니 해도,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잔혹하고 야심 많은 삼촌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최근,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뿐만 아니라 자신의 형이자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의 죽음에까지 깊이 관여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이는 어린 왕이 즉위한 후 나타난 불안한 정치상황 때문이 아니라, 애초부터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을 위해 오랜 세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소리이다. 문종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病死)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세조의 후궁인 소용 박 씨의 연애편지 한 통 때문에 왕위 찬탈의 숨겨진 부분들이 폭로되는 과정을 그린 것인데, 단종뿐만 아니라 문종의 죽음의 비밀까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을 구상할 때, 처음부터 문종의 죽음에 주목했던 것은 아니었다. 관심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는데, 앞서 낸 소설 『훈민정음의 비밀』(2008)이후 미처 밝히지 못한 훈민정음의 비밀을 마저 쓸 계획이었다. 세종 때 만들어진 훈민정음이 세조에 이르러 언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세조가 권력 쟁취를 위해 사용(私用)한 정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교를 국가의 근간이념으로 표방한 세종대왕과 그 사상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훈민정음이, 세조시절 언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부처의 일대기를 다룬 『월인석보』의 1권 첫머리에 보란 듯이 묶인 사실에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훈민정음 언해본과 세조의 권력 찬탈과의 관계를 면밀히 조사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 과정에서 문종의 독살설까지 손이 닿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그동안 병사(病死)로 알려진 문종의 죽음이 철저히 준비된 독살이었음을 유추해보는 과정이 될 것이다. 증거를 남기지 않는, 그래서 지금까지 드러날 수 없었던, 하지만 이제야 그 현장의 진실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매우 특이한 과정 말이다.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으나 모든 사람이 왕의 죽음에 가담한, 죽이지 않았으나 죽을 수밖에 없는 미묘한 독살과정 말이다. 세조는 문종의 죽음에 대한 치밀한 계획은 물론, 즉위 후 왕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은밀하고 대담한 작업을 한 듯하다. 세조가 왕의 정통성을 위해 사육신과 단종을 죽였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동시에 장자 상속이 아니라 찬탈한 왕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일종의 거대 비밀작업을 병행했던 듯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소용 박 씨는 조선왕조실록에 세조의 조카인 귀성군에게 연애편지를 썼다가 목숨을 잃은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소설을 쓰면서 세조실록이나 다른 역사적 기록을 참조하긴 했으나, 필요에 따라 새로 창조한 인물이나 변형한 인물을 섞어 재미를 더해 보았다.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편지들로 이루어진 서간체 소설이므로 당시의 철자법이나 어투를 그대로 따를 수 없었던 점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여태 보이지 않던 것이 어느 순간 얼핏 보일 때가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번개처럼 한순간 충격적인 진실을 본 듯한 체험과 심정적 묘미를 느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