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마지막 회
소용 박 씨가 죽기 전에 귀성군에게 남겨 놓은 서찰
1465년 6월 24일
곧 들이닥칠 것이다,
군에게 서찰을 보낸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고 말았으니! 오늘, 늦어도 내일이면 사람들이 들이 닥칠 것이다. 이제 끌려가면 군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군에게 내 마지막 마음을 전할 서찰이 될지도 모른다. 만약에 내가 살아남게 된다면, 이 서찰은 군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조치해 놓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서찰을 군이 읽게 된다는 것은, 내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궁금하지도 않았을까.
꼭 한번 만나야겠다고, 내 평생 가슴에 담아두었던 말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어쩌면 군의 생사가 걸린 일일지도 모른다고, 나뿐만 아니라 나인들, 환관들까지… 여러 사람이 생사를 걸고 어렵게 보낸 그 서찰을 군은 어찌하여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일까? 어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평생 다시 만날 일 없이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자는 요청이었다. 마음속으로 너무 많이 불러 어쩌면 뼈 속까지 새겨졌을 이름, ‘백팔장’. 그 이름을 부르며 서찰을 보냈는데, 어찌 군은 아버지 임영대군에게 그 서찰을 내밀었단 말인가. 어찌 두 사람은 서둘러 입궐하여 냉큼 왕의 손에 그 서찰을 넘겨주고 말았을까?
그 동안, 우리는 어떤 관계였을까.
먼발치에서, 무술을 배우러 수양대군 댁을 찾아오는 군을 가끔 먼발치에서 보았다.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지만, 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먼발치의 사람이라고 바라만 보아도 족하게 여겼던 군이 아주 가까이, 바로 내 눈앞에 나타난 날, 당황한 나는 쥐고 있던 토끼를 놓쳐버렸다. 토끼를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서로 부딪고, 가쁜 숨을 쉬면서 돌아다니는 동안, 몸속에서 잠자던 불덩이가 폭발하고, 씨앗들이 모두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몰래 와서 건네준, 자신이 달라고 할 때만 보여주고,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받고 건네준 그 서찰에는, 달랑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百八張! 무슨 상관이 있었으랴. 그 글자가 ‘개똥’이건 ‘호박꽃’이건, 나와 군만 아는 비밀이라면 무엇이 적혀 있건 무슨 상관이랴. 고민할 필요도 없었지.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귀성군’이나 ‘이준’이 아니라, 나는 그것을 우리 둘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이라 여겼다. 그 뒤로 평생, 살아있는 날 동안 나에게 귀성군은 사랑의 백팔장이었다.
궐로 들어가 후궁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중전의 심부름으로 궐을 나갈 때마다, 군도 궐에 들여보낼 거머리를 가져가기 위해 오곤 했다. 나는 생강과의 다년초인 울금가루를 구하러 나갔다. 잠저 ‘덕중의 정원’에는 구할 수 없는 풀이 거의 없었으니까. 종기 치료를 위해 거머리를 사용하게 되면 독을 빨아들인 거머리도 위험해진다 했다. 거머리 위에 울금가루를 뿌려 거머리가 환자에게서 빨아올린 피를 토하게 만든다 했다. 왕의 종기 치료를 위해 거머리를 구하는 것을 귀성군을 시키고, 울금가루를 구하는 일을 나에게 시켰던 것이다.
한 사람에게 시켜도 될 것을 두 사람에게 시킨 것이다.
잠저에 들를 때마다 둘이 마주치던 그 우연에 대해 의심을 가졌어야 했다. 그러나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기에 의심은 빛을 잃고,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느꼈다. 귀성군! 나는 왕의 아이를 낳았다. 아지, 왕의 아들이지만, 군의 아들이기도 했다. 새삼스레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뜬금없이 서찰을 보낸 것은 아니다. 살아 있을 때도 밝히지 않은 것을, 이제 와서 새삼 죽은 자식 불알 만져보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지는 원인을 알 수 없이 죽었다. 중전에게 의심과 궁금증을 토로했다. 중전은 “아들이 죽어간 원인은 알 수 있어도 아지나 대군이 죽어간 이유는 알 수 없다” 했다. 그러고 보니 중전은 나보다 앞서 의경세자를 잃었다. 아지는 다섯 살 아이였지만, 당시 의경세자는 이미 청년이었다. 더구나 보위를 이어 왕이 될 의경세자를 잃은 것은 어린 왕을 죽인 대가로 그 어미인 현덕왕후의 혼이 원수를 갚은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으니, 중전의 고통이 오죽했으랴. 역지사지(易地思之)라 측은지심이 생기고, 스스로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이삼 년이 흘렀다.
그런데 귀성군!
지난 삼월에 세자의 새 세자빈의 회임이 확인되었다. 첫 번째 세자빈이 죽고 세자빈이 낳은 인성대군마저 죽은 뒤라, 새 세자빈의 회임 소식은 우울한 궐 안에 봄 나비처럼 기쁜 소식이었다. 감축하려고 처소에 들렀다가, 심하게 입덧을 하는 세자빈을 보게 되었다. 나도 아지를 가졌을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입덧이 심했었다. 자칫 군의 아이임이 의술에 의해 드러날까 두려워 궐내 의녀나 공식적인 처방도 되도록 피했는데, 그 당시 나의 입덧을 재우는 유일한 해결책은 승려 덕중이 잠저에서 건네준 반하 가루였다. 그 반하 가루를 구해서 세자빈에게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귀성군, 승려 덕중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우리 세 사람이 얽힌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 사저 시절에, 내가 보기에, 승려 덕중과 귀성군은 서로 잘 통하는 듯이 보였다. 당시 군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던 나는 무의식중에 승려 덕중 앞에서 ‘백팔장’이라는 표현을 입에 올린 적이 있었다. 승려 덕중은 깜짝 놀라더니, 어떻게 백팔장과 연락을 취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혹여 귀성군과의 비밀이 드러날까 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번 만남에서 그는 나에게 훈민정음 세종어지 서문 108자가 든 종이를 건네주며 ‘백팔장’이 나에게 주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귀성군이 승려 덕중을 통해 나에게 그것을 선물로 보내 준 것이라 여겼다. 궐에 들어와 후궁이 되고 나서도 귀성군으로부터 받은 ‘백팔장’이라고 적힌 종이와 승려 덕중으로부터 넘겨받은 ‘세종어지 서문 108’을 벽에 함께 붙여두었다. 혹여 귀성군과 나와의 비밀을 누군가 눈치챌까 봐 종이로 덮어 숨겨 두었었다.
내 아들 아지가 왜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장난기 많고 호기심 많았던 내 아들은 우연히 벽지를 뜯다가 그 밑에 쓰여 있던 (‘총일’은 보지 못하고) ‘백팔장’이라는 글자를 본 모양이었다. 입맛을 잃은 왕을 위해 일부러 수라상에 앉혀진 아지는 막 익히기 시작한 글자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백팔장’ 중에 다섯 살 아지가 알아본 글자는 ‘백팔’이었던 모양이었다. 아지가 백팔을 입에 올렸을 때, 왕의 얼굴은 굳어졌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아지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숫자라고 했다. 언젠가 아지가 숫자에 대해 물었을 때, 그런 대답을 한 것 같다. 글자 자랑에 신이 난 아지는 손으로 ‘百八’을 써보였을 뿐 아니라, 읽을 줄도 모르는 마지막 글자 ‘張’까지 대강 그려내는 것이었다. 왕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눈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가슴이 뛰었지만, 왕이 백팔장과 귀성군을 연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다음 날 수라상 앞에서 아지는 발작을 했다. 아지는 여러 날 고통에 몸을 떨며 비틀다가 결국 내 방에서 죽었다. 아지가 죽은 충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와 왕의 관계가 갑자기 멀어진 것도 그 이후였다.
다시 세자빈의 입덧 이야기를 하겠다. 한 달 전 쯤, 세자빈의 입덧을 위한 조약을 얻기 위해 승려 덕중을 잠저에서 만났을 때였다. 어쩔 수 없이 아지 이야기가 나왔고, 승려 덕중에게 아지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백팔장’ 이름이 다시 나왔다. 승려 덕중은 내가 백팔장을 귀성군으로 알았다는 말에, 처음으로 내 손을 잡았다. 승려 덕중은 아지 왕자군이 죽었을 당시 항간에 퍼졌던 소문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왕의 혈육이나 측근이 죽을 때마다 형제의 혈육이나 측근이 죽어간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다. 인성대군이 죽은 해에 아지 왕자군이 죽었으니, 인성대군은 왕의 혈육이고 아지 왕자군이 형제의 혈육이 된 셈이라 했다. 소문이 어쩌면 그렇게 정확한지 놀라울 정도라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놀라 묻자, 승려 덕중도 아차 하는 듯 했다. 아지가 왕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귀성군의 아이라는 사실을 승려 덕중은 알고 있었다. 그럼 누가 또 알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모른다고 했다.
귀성군, 내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한 번 만나자는 서찰을 보냈는지 이제 대강 짐작할 것이다. 나는 우리 둘의 관계에서부터 왕과 귀성군의 관계, 승려 덕중과 귀성군의 관계, 그리고 도대체 내 아들이 왜 백팔장이라는 이름 때문에 죽어 갔는지 등, 풀어야 할 수많은 의문에 봉착했던 것이다. 아지의 억울함을 풀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승려 덕중의 몇 가지 말 속뜻에서, 백팔장이 백팔명의 사람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승려 덕중은 백팔장의 정체를 알고 있으나 그 자신도 뭔가 혼란 속에 빠져 있었고, 나름 진실을 파헤쳐 보아야겠다는 심중을 가지고 있었다.
서찰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이제 끌려가면, 아지의 죽음에 ‘백팔장’이 어떻게 관여했는지 알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아지의 죽음에 대해 매달리자, 승려 덕중은 마지못해, 두 왕자가 죽어야 한다는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의경세자에 이어 유일한 적손 왕자인 해양세자가 죽을까 봐, 앞질러 아지를 선택한 것 같다고 했다. ‘총일’과 ‘백팔장’ 친필서명을 건네주면, 남은 비밀을 파헤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귀성군! 벽에 붙여 숨겨 놓은 108자 어제 서문은 조금 전 막 드러내놓았다. 승려 덕중은 두 친필서명을 원했으나, 그 친필서명들이 여러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기에, 나는 ‘백팔장’ 서명만을 그에게 보내 주었다. 승려 덕중이 요구한 ‘총일’과 ‘백팔장’ 두 서명 중에 나머지 하나는 당신에게 남기고자 한다. 그것이 내가 사랑한 당신의 목숨을 보전해 줄 것이다. ‘총일’은 내 방 벽에 그대로 두지만, 예전처럼 종이로 숨겨놓을 것이다.
군에게 서찰을 전하게 했다가 이미 나인 둘과 환관 둘이 끌려가서 심한 고초를 당하고 있다. 이 상황에 서찰을 다시 전해달라고 누구에게 부탁할 수 있으랴. 사람의 손을 통하지 않고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쓰게 될 것이니, 그리 알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알아낸 비밀로 이제 작별을 고하려 한다. ‘총일’은 왕의 친필이었다.
그럼, 내 사랑 안녕, 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