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회
백팔장이 승려 덕중에게
백팔장이 승려 덕중에게
1466년 7월 17일
너 일장(一張)과 나 백팔장(百八張)은 우리 모임의 시작이며 끝이다. 우리는 서로의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 너는 지금 묻고 싶을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문종 임금의 생사에 관여했는지 말이다. 그 질문이라면 모든 진실을 이야기해줄 수 있다.
우선 사냥을 즐기는 수양대군에게 살생을 멈추도록 설득한 너는, 참으로 큰일을 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불가의 뜻이 아니더냐. 어디 그 뿐이더냐. 너는 사냥에서 살아남은 짐승들을 키우는 여종 덕중에게 쑥부쟁이, 초롱꽃, 자초기, 매발톱 등 아름다운 야생초들을 가져다주었다. 그것들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들로 백삼장(百三張)이 고생을 좀 했지. 식생활에 도움이 되는 원추리, 민들레, 곰취, 털머위, 고사리도 부지런히 구해왔다. 백삼장(百三張)이 구해온 그것들을 너는 기꺼이 덕중의 정원으로 날랐다. 독성이 있는 것은 피하고 또 조심해가면서.
죽음을 간신히 면한 짐승들이 여종 덕중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생명이 붙은 것을 귀하게 여겼던 그 여자는 정성을 다해 그것들을 보살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키워진 짐승들은 귀성군을 통해 임영대군 댁으로 보내졌다. 조카와 동생 임영대군을 위해 수양대군이 보낸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형제애더냐. 임영대군은 그 귀한 짐승들을 차마 먹어 없앨 수도 팔아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궐에 계시는 형님이신 문종께서 꿩고기를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최상등품의 꿩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궐에서 고기를 구입하는 사옹원 환관들에게 동생 대군들이 형님을 위해 귀한 꿩을 대접하고자 하니 가져가달라고 부탁했고, 그들은 기꺼이 그 꿩들을 공식적으로 사온 꿩들과 바꾸어 궐에 들여갔던 것이다. 그 환관은 방 씨와 강 씨였는데, 현재 강 씨는 주상전하의 차(茶)를 담당하는 상차가 되었고, 방 씨는 경복궁 잠실을 책임 맡은 환관이 되었다. 그처럼 살생을 금하는 불가의 뜻과 왕족들의 형제애와 충성스런 신하의 정성이 함께 어우러진 꿩을 당시 최고 요리사인 조 씨가 요리했는데, 그는 지금 완전히 출궁하여 꿩요리 전문 음식점인 ‘천복’을 막 열었다고 들었다. 문종 임금이 즐겨 드시던 꿩요리라고 소문이 나자 백성들이 맛을 보기 위해 줄을 선다한다. 당연히 꿩고기 요리는 당시 기미상궁의 기미를 거쳐 안전하게 문종 임금의 수라상 위에 올라갔던 것이다. 어느 과정에서 사랑과 정성 없이 이루어진 일이 있더냐.
임금이 돌아가시면, 관례적으로 어의는 잘못이 있건 없건 벌을 받기 마련이고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기도 한다. 문종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도 사람들은 어의 전순의에게 세 가지 죄목을 들먹였다. 첫째, 종기가 번성했을 때 움직이는 것을 금해야 하는데, 전순의는 문종 임금에게 사신들을 접대하는 연회에 참석하라고 부추겼다고 했다. 둘째, 종기에 고름이 가득 차지도 않았는데, 침으로 종기를 건드려 도리어 염증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셋째는 종기에는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피해야 하는데, 계속 문종 임금에게 꿩을 드시도록 했다는 것이다.
자, 일장(一張) 덕중, 너는 현명하니 이 세 가지 죄목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단숨에 파악했을 것이다. 왕이 사신을 접대한 일과 어의가 왕을 위해 종기의 고름을 짜낸 것이 어찌 죄가 된다는 말이냐. 기름기가 많은 돼지고기나 꿩고기를 피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평생 종기에 시달리시는 임금님 음식에 고기 쪼가리는 아예 올리지 말라는 얘기인가. 그렇게 되면 영양이 모자라 도로 옥체를 상하시지는 않겠는가. 결국, 내의원에서 쫓겨났던 전순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신을 돌려받았고, 현왕이 즉위했을 때는 아예 1등 공신이 되어, 지금도 임금님의 옥체를 돌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지.
덕중아. 네가 진정으로 궁금해 하는 것을 알고 있다. 문종의 생사에 우리 백팔장 모임이 관여했는가 하는 것 말이다. 네 스스로 대답을 찾을 수 있도록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 만약에 문종의 생사에 누군가 관여했다면, 그가 누구일 것이라고 짐작하느냐. 누가 그 위험하고도 막중한 역할을 맡았을 것 같으냐. 대답은 이렇다. 여종 덕중은 수양대군 사저의 정원에서 닭이나 토끼, 심지어 노루까지 자유롭게 풀어 키웠다. 새나 꿩이나 날짐승도 큰 그물 속에 풀어 키웠다. 그것들은 풀을 마음껏 뜯어 먹을 수 있는 배려를 받았다. 꿩들이 생리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풀이 반하라는 것은 너도 알 것이다. 꿩들은 반하를 보면 사족을 못 쓴다. 너는 꿩들을 위해, 여종 덕중을 위해, 부지런히 반하를 가져다 수양대군의 사저에 심지 않았느냐. 반하라는 풀은 음력 4월경이면 매우 독성이 강해진다. 반하는 소량이면 임신으로 인한 구토를 다스리는 약재로 쓰일 수도 있지만, 반하를 지속적으로 먹어 독성이 강해진 꿩은 인간이나 짐승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문종의 생사에 관여했다면, 임금이 드실 꿩에 끊임없이 반하를 가져다주고 이를 먹여 키운 이들이 아니겠느냐.
덕중아, 놀랄 것 없느니라.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네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네 죄를 이번 계룡산 전체 모임에서 폭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백팔장 모임이 문종의 생사에 관여했느냐는 의심들에 대한 답변을 위해 너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네가 무슨 일을 했단 말이냐. 네가 한 일이라고는 수양대군과 백팔장(百八張)사이에서 중간자 역할을 한 것과 여종 덕중과 친분을 쌓으면서 이 나라에 불교가 다시 융성해지도록 공헌한 일 외에 더 있더냐. 내가 너에게 준 108자 세종어지 서문이 적혔던 종이는, 이제야 밝히지만, 밀약서의 일부분이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너는 여종 덕중을 통해 수양대군에게 그것을 잘 전했다. 밀약서의 원본은 지금 주상전하께서 보관하고 계신다.
그런데 말이지. 내가 최근에 백일장이 너에게 보낸 서찰의 내용을 엿볼 기회가 있었는데 말이지, 물론 네가 백일장에게 보낸 회신까지 가로채 보게 되었더란 말이지. 섭섭하게 여기지는 말게. 백일장이 밀약서를 자신이 보관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해달라는 청을 하는 서찰을 읽고,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나. 네가 잘못 말려들어 변이나 당할까 염려되어 사람을 붙여 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자네의 회신을 나에게 가져다주더구먼. 그 서찰에는 밀약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며 네가 백일장의 청을 거절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여전히 네가 문종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그 답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덕중, 백일장과 백이장 짝패는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표 모임에서 밀약서를 누가 보관하고 있느냐고 난리들을 치길래, 네가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자네에게 건네주었으니 맞는 말이기도 하지. 백일장이 내 말을 이용해서 살 궁리를 했으니 죽임을 당해도 억울하다 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그 밀약서는 주상전하가 보관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감히 주상전하를… 목숨을 잃어도 몇 번은 잃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살릴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나. 네가 더 이상 다른 생각 없이 이번 계룡산 모임에 와서 본래의 역할을 다해 준다면, 그들의 목숨을 구제해 보도록 노력하겠다. 다시 말해 그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단 한사람이 바로 자네라는 뜻이다.
덕중, 자네가 마음을 다잡도록 도와주기 위해, 마지막으로 누가 문종 임금을 죽였는지 대답해 줌세. 그 범인은 흠, 사냥을 즐긴 수양대군, 살생을 금하도록 한 부처의 뜻을 전하도록 시킨 나 백팔장, 야생초를 구한 백삼장, 야생초를 나른 너 일장(一張), 꿩을 키운 여종 덕중, 꿩을 아버지께 가져다 드린 귀성군, 꿩을 환관에게 전한 임영대군, 꿩을 바꿔치기한 환관 방 씨와 강 씨, 꿩 요리를 왕에게 드리도록 한 전순의, 꿩을 요리한 조 씨, 꿩을 기미한 오 씨 등,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라네.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반하를 좋아한 꿩, 반하를 무럭무럭 키운 대지, 그 대지에 자양분을 공급한 죽은 자들의 시체, 자양분이 뿌리로 흘러가게 만든 빗물, 비를 몰고 온 구름, 구름을 실어 나른 바람, 바람을 생기게 만든 삼라만상의 진행과 흐름이 전부 범인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다한 자연과 온전한 사랑과 정성을 지닌 인연들이 임금을 죽인 것이지. 문종 임금만 그렇겠는가. 한 인간이 죽어 가는데, 우리 모두가 ,알게 모르게, 기꺼이 조력하게 되어 있다네.
덕중! 이제 이해하겠나, 그 누구도 문종 임금을 죽이지 않았다.
계룡산에서 보세.
백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