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백팔장이 임금에게
1466년 7월 15일
전하, 옥체만강 하옵신지요. 황공하옵게도 전하의 친서를 받았습니다. 소신에 대한 믿음과 우정을 회복하셨다는 글귀를 읽었을 때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무릎을 꿇고, 주상전하가 계신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전하께서 그간의 과정을 세세하게 적으시어 소신의 오해를 풀어주시니, 소신도 그간의 과정을 그대로 적어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주상전하의 우려를 덜어드리고자 합니다.
산속에서 수도하는 소승들이야 세상 돌아가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본래의 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의 입에 ‘백팔’이라는 표현이 자주 오르내리는 것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소용 박 씨가 귀성군에게 연서를 보낸 죄로 처형을 당하면서 ‘백팔’을 언급했다는 사실과 그 후로 주상전하로부터 어떠한 연통도 오지 않는 상황으로 미루어 일련의 변화를 예감하였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과거 배척당한 경험이 있는 소승들의 처지로써는 혹여 주상전하께서 우리와 인연을 끊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앞일을 위해, 소인은 왕과 백팔장 모임 사이에 밀약서가 있다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보내 승려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전하, 당연히 백팔장 모임 내부가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이 된 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나, 주상전하, 큰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작은 비밀을 역이용해볼 생각입니다. 우선 밀약서가 어디에 있느냐고 다들 난리이니, 이번 계룡산 모임에서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합의서 원본에 양쪽 서명을 하려던 순간부터 이야기하면, ‘摠一百八張’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부왕인 세종대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신 대군께서는 여덟 왕자 중에 가장 많은 군호를 받으셨습니다. 12살 가례를 올린 해에 진평대군이 되셨고, 17세에 함평대군이 되셨으나 그 의미가 천한 듯하다 하여 며칠 만에 다시 진양대군이 되셨고, 훈민정음을 반포한 이듬해이자 29세가 되시던 해에 드디어 수양(首陽)대군이 되셨습니다. 합의서 원본에 서명을 하려던 순간에, 대군께서는 군호로 ‘수양’이냐 ‘총일’이냐를 두고 부왕께서 망설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 다 ‘여럿 중의 으뜸’이라는 뜻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총일은 ‘모두 합쳐서 하나’라는 풀이까지 더해져 혹여 ‘왕’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람들이 오해하게 될까 봐 ‘수양’을 택하신 듯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신은 앞으로 왕이 되실 분이니 더 큰 의미가 있는 ‘총일’을 사용하시라 권하였고, 그렇게 양쪽이 서명을 하고보니 ‘총일 백팔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전하, 양쪽 서명이 들어간 합의서를 들여다보며, 동시에 무릎을 치고, 마주보며 의기투합했던, 그 날을 기억하시는지요. 밀약서 서명자를 만천하에 내놓고도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 할 수 있는 묘책이 그때 떠올랐지요. 합의의 징표로, 부처의 일대기를 다룬『월인석보』 1권의 맨 앞에 백성의 소리인 훈민정음 언해본을 불교의 신성수인 108자로 맞춰 넣고, 1권의 108면을 막아 끝부분에 ‘총일백팔장(摠一百八張)’을 삽입해 넣기로 한 것입니다. 눈가림을 위해 摠一百八張(총일백팔장)을 摠一百/八張(총일백/팔장)으로 나누어 줄을 바꿔 넣자는 세심한 전략까지 짠 것입니다. 이로써 그 누구도 이것이 왕과 백팔장 모임의 공동 합의서임을 모르게 할 수 있는 비책을 찾아낸 것입니다.
<『월인석보』 1권의 마지막 페이지 끝부분에 있는 ‘총일백팔장’이라는 표기 >
전하, 『월인석보』 1권이 완성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까지 상대방의 친필이 새겨진 합의서를 나누어 지니기로 한 것은, 서로를 배반할 수 없게끔 묶어두는 믿음의 보증서 같은 것이었습니다. 작금의 주상전하와 소신 사이라면 필요치 않았겠지만, 당시는 수양대군과 소신 모두 목숨을 걸어야 했던 기획이었기에 그런 수순을 밟지 않았습니까.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본하는 『월인석보』작업은 세종시절 훈민정음 반포 직후부터 진행된 사업이었습니다. 수양대군도 아시다시피『월인석보』 1권 안에 108자 훈민정음 언해본을 넣고 권말에 ‘총일백팔장’을 넣는 작업은 우리 백팔장 모임이 비밀리에 끝마쳤습니다. 물론 『월인석보』는 25권에 이르는 거대한 사업이어서 세종대왕 치하에서 완성이 어려웠고, 결국 문종 임금과 노산군을 거쳐, 드디어 전하에 이르러서야 『월인석보』 1권을 포함한 나머지 서책들을 세상에 내놓았던 것입니다.
전하, 전하의 친서를 받고 그간의 흐름을 짚어본 결과, 문제는 바로 『월인석보』 1권 완성 후 나눠 가지고 있던 친필 합의서 원본을 승려 덕중에게 보관케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수양대군께서는 제 서명이 들어간 합의서를 귀성군에게 주어 승려 덕중에게 전하게 하셨으나, 귀성군은 착각하여 이를 여종 덕중에게 전하고 말았고, 여종 덕중은 그 종잇장을 연모의 표시라고 착각하여 귀성군을 계속 ‘백팔장’으로 여겨 죽어가며 그 이름을 불렀다니, 우리 백팔장 모임과는 연관이, 다행히, 없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주상전하께서는 소신이 승려 덕중에게 건네주어야 할 합의서 원본의 일부분이 어떻게 소용 박 씨의 벽에서 나왔는지에 대해 알려 달라 명하셨습니다. 소신도 그 글귀를 읽고 얼마나 놀랐는지 한동안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세종어제 서문 108자와 그 끝부분에 ‘총일’이라는 이름이 붙은 원본 합의서를 승려 덕중에게 분명히 건네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쪽 합의서라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합의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만하게 받아들여 혹여 일을 그르칠까 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승려 덕중에게 건넨 합의서가 소용 박 씨의 방벽에 붙어 있었다면, 필시 승려 덕중이 소용 박 씨에게 주었다는 해석외에 다른 해석은 불가능합니다.
전하, 승려 덕중의 동태를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소용 박 씨가 없으니 그 모든 열쇠를 그가 쥐고 있지 않겠습니까. 승려 덕중은 최근 백이장과 백일장 짝패와 연락을 취했습니다. 금강산 땡추 두목인 백이장이 갑자기 우리 모임을 떠나버렸는데, 그를 찾아오라고 백일장에게 명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이장이 떠나기 직전에 누군가에게 서찰을 보내는 것을 보고, 그 인편을 주막에서 취하게 하여 서찰을 중간에서 훔쳐 읽어보고 도로 넣어 놓았습니다. 백일장의 서찰에 따르면, 백이장과 자신의 신변이 위태로운 것 같으니 덕중이 보관하고 있는 합의서 원본을 자신에게 맡겼다고 말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감히 그런 요사를 부탁하다니, 필요에 따라 백이장과 백일장 짝패를 제거할 수 있는 단서를 잡은 셈입니다. 그 부탁에 승려 덕중이 어떤 회신을 할지 알 수 없지만, 특이한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고 없습니다. 승려 덕중은 백팔장 모임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자 상징적인 ‘일장’이니, 그가 조금이라도 모임에 대해 회의를 가지면 그 여파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전하, 이제 보름쯤 있으면, 삼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백팔장 전체 모임이 계룡산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주상전하께서 참석하신다고 하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모임은 주상전하의 건강을 기원하고 새로 탄생하신 원손의 미래를 감축하기 위해 전국의 승려들이 불공을 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번 백팔장 모임에 행차하시면, 그들이 원하는 답을 친히 주시옵소서. 합의서 원본이 궐 안 소용 박 씨 처소의 벽에 있다면 그것 또한 전하의 것이오니, 합의서 원본은 전하께서 보관하고 있다 하옵소서. 승려 덕중도 여종 덕중에게 전한 그 서찰이 수양대군에게 전해졌다고 여기고 의심이나 오해를 풀 것이옵니다. ‘총일’ 서명이 든 부분은 소용 박 씨의 벽에 있으니, 없는 부분은 바로 제 친필 서명뿐입니다. 필요하다면, 제 이름은 다시 쓰면 그만입니다.
백팔장 승려들이 진실을 굳이 확인하려 들거나 의심이 극해 달한다면 주상전하께서 『월인석보』를 내보이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월인석보』를 직접 보여 주시면서 합의서의 양쪽 이름이 1권 안에 들어왔는지 설명하시옵소서. 도처에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합의서의 비밀이 이것이라고 알려주시옵소서. 『월인석보』 1권의 끝부분에 새겨진 ‘총일백팔장'의 비밀을 알게 되면, 그동안 자신들이 얼마나 큰일을 해왔는지에 대해 자각하고, 이 나라 왕이 얼마나 불교와 승려들을 온전하게 사랑하는지 알게 될 것이옵니다. 백팔장 모임의 근간을 다시 굳건하게 세울 수 있도록 주상전하께서 그들에게 확신과 감동을 주소서.
주상전하, 백팔장 마지막으로 한 말씀 아뢰옵니다. 『월인석보』 속 ‘총일백팔장'의 비밀! 이 큰 비밀을 온 세상에 밝히는 것은 그것을 터뜨려 더 큰 비밀을 지키기 위함이니, 주상전하의 안위와 불교의 영광을 위해 그들의 의심의 귀와 눈을 온전하게 막아주시옵소서. 그럼, 뵈올 날까지 옥체 보전하소서.
백팔장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