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환관 방비리가 잠녀 고아라에게
1466년 7월 9일
요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정신이 아득한 것이 꿈만 같네. 앞서 선잠례1도 치렀고, 친잠례 때도 조견의 수견의를 거쳐 모든 절차를 빠뜨리지 않았으며, 친잠례 후 주상전하께서 백관들에게 주악을 내리는 뒤풀이까지 온전히 진행했으니, 행사 규모가 어느 때보다 컸네. 그 누구도 한 치 실수가 없었던,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인 행사였네.
황금빛 무늬가 찬란한 국의(菊衣)를 입으신 중전마마께서 아청색(鴉靑色)으로 단장한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나타나실 때만 해도, 나는 행사에만 신경이 가 있었다네. 수레를 탄 중전마마께서 여신 같은 위엄과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압도하고 계셨으니 말이오. 중전마마께서 수레에서 연으로 옮겨 타시고 친잠소의 채상단 동문 밖에 이르렀을 때, 내명부 채상녀인 근빈 박 씨가 따라 내리지 않았나. 소용 박 씨가 있었다면 분명 중전마마와 함께 뽕잎을 따는 채상녀가 되었을 터이지. 그때, 채상단 뒤쪽 뽕나무 옆에 서 있는 귀성군이 얼핏 보였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전 상선 어른이 귀성군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네. 나는 모르는 척 행사 진행을 계속 했지만, 그때부터는 행사보다 귀성군과 관련된 전 상선의 움직임이나 자네의 행동에 신경이 쓰여, 등에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네.
중전마마께서 채상단에 올라가 동향으로 서셨을 때, 상공2은 갈고리를 받들어 올렸고 중전마마는 그 갈고리로 뽕잎을 따는 일을 시작하셨지. 모두들 중전마마의 움직임을 주시하느라고 고개를 쳐들었지만, 전 상선만큼은 귀성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네. 순간, 자네가 바늘구멍을 새긴 뽕잎을 뜯어내버린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네. 소용 박 씨가 귀성군을 친잠례 행사 때 만나려 했다는 것 정도는 상차 강원종이나 전 상선도 파악했을 것이네. 뽕잎에 새겨진 글자의 의미를 아는 그들이 귀성군의 행동을 주시한다는 것은 그 다음 일어날 일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나. 다행히 자네가 그 뽕잎을 제거해 버렸기에 귀성군이 말려들지 않게 된 셈이네. 전 상선에게 걸려들었다는 것은 임금님에게 걸려들었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전 상선은 현장을 잡을 태세였던 셈이지.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전 상선을 비롯한 몇 사람이 친잠례가 진행되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피는 것 같았지만, 귀성군은 그 문제의 뽕나무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네. 그들은 귀성군의 무반응에 놀랐을 것이네. 게다가 자네는 한술 더 뜨지 않았나. 중전마마께서 자네에게 뽕나무에 대해 설명을 하라고 하셨을 때, 자네는 뽕잎에 바늘로 구멍을 새기는 장면을 연출하지 않았나. 예상 밖의 행동에 놀라시는 중전마마께 뽕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이과수인데, 암꽃이 피는 나무에 표시를 해두면, 원유에 있는 천 그루의 뽕나무에 암꽃과 수꽃이 교대로 피는 것임을 알게 된다고 설명한 것이네. 채상단에서 바라볼 때 정 중앙에 있는 나무에 표시를 해두어 착각하지 않도록 한다고 대답했네. 그 나무가 바로 귀성군이 서 있도록 되어 있는 나무였지. 물론 중전마마도 귀성군도 전 상선도 모두 바라보고 있는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네. 자네 설명대로 중전마마나 전 상선은 정말 암꽃과 수꽃이 피는 나무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귀성군은 그 와중에도 그 행위가 소용 박 씨와 관련된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네. 전 상선이나 상차 강원종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지.
중전마마와 내외명부께서 잠모들이 잘게 썬 뽕잎을 누에들에게 뿌려주기 위해 잠실에 들어가셨을 때가 있지 않았나. 잠실 바깥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강 상차에게 다가가 아무래도 그동안 누군가 수나방이를 빼돌린 것 같다고 귀띔하듯 슬쩍 던져보았다네. 화들짝 놀라더라구. 그 사람의 성격대로라면 발뺌을 했을 터인데, 도리어 담담하게 이렇게 말하더란 말이지. “나도 왜 환관들이 수나방이를 그렇게 찾는지 여적 이해를 하지 못했어. 전 상선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리고 또 환관들의 처지를 동정해서 눈감아준 것뿐이여. 수나방이를 빼돌려 내가 사용한 것이 있어야 말이지. 왜 환관들이 수나방이를 그렇게 먹고 싶어 했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지만 말이여. 여자를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어… 쯔쯥.” 나는 더 캐묻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네. 그때 강 상차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주시하더니, “쯔쯥, 그 바늘구멍 말이여, 어느 잠녀가 어느 사내에게 은밀하게 보내는 표시가 아닌가 하고 한순간 의심을 했더랬어”라며 뼈있는 농을 던졌네. 수나방이 비밀을 건드린 보답이라고나 할까,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겨냥해서 한 소리지… 으음.
이왕 말이 나왔으니, 뽕잎에 새겨진 글자를 나름 해석했다고 했는데 무슨 의미였는고 놀리듯 물었지. 그랬더니 작년 뽕잎의 숫자는 108로 해석한 과정을 설명했고, 올해 뽕잎에 60을 새긴 것도 알고 있었네. 터무니없다는 식으로 헛웃음을 날렸지. 하지만 그의 해석을 통해 뽕잎에 있는 글자 108과 60이 둘 다 108을 의미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네. 어떻게 60이 108자가 되느냐하면, 뽕나무 상(桑)자는 약자로 쓰면 나무 목(木)과 세 개의 열십 자(十)로 나타나는데, 즉 木과 세 개의 十를 합치면(十 十 十 十 八) 마흔여덟이 된다는 것이었네. 그래서 마흔여덟 된 자를 상년이라고 한다더구먼. 상차의 해석을 들으니, 뽕나무가 이미 48을 의미한다면 60만 새겨도 108이 되는 것이 아닌가, 소용 박 씨가 새기길 원했던 숫자는 두 번 다 108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소용 박 씨는 자네에게 건넨 서찰을 잠실 쪽에서 시작하여 아홉째 줄 열두 번째 아래에 묻어두라고 했는데, 숫자를 세어보니 정확하게 108번째 되는 나무였네. 우리의 뜻을 알아챘다면, 귀성군은 백팔 나무 밑에서 소용 박 씨의 서찰을 제대로 찾아갈 것이네.
아라님, 이번에는 어찌어찌 위기를 넘긴 듯하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섭섭하게 여기지 말게. 소용 박 씨와 관련된 일은 여기서 그만 두면 어떨까 하네. 죽은 소용 박 씨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인간적인 도리이긴 하나, 그것이 귀성군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도 있으니 말이지. 나나 자네도 마찬가지고. 과거 세종대왕께서 잠실도외를 세우실 때만 해도 잠실은 상의원에서 관할했지만, 문종시절부터 궁중의 내잠실과 아차산 잠실에는 환관이 배치되었네. 잠실을 관리하는 일은 환관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권한 중의 하나인데 만약 내가 실수라도 하면… 나를 데려온 김 상선이나… 다른 환관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네. 죽은 소용 박 씨도 아라님이 충분히 애를 썼다고 여길 것이네.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올해는 더 많은 누에를 수확할 수 있을 것이네. 작년에 한 잠동의 누에가 병들고도 이전 수확량이 나온 것은, 작년에는 내 감시 하에 그들이 수나방이를 빼돌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네. 그들 입장에서 보면 내가 불편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네. 전 상선이나 강 상차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사실 알 수 없다네. 수나방이를 몰래 빼돌린 전력을 내가 문제 삼을까 봐, 나를 경복궁 밖으로 내몰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을 것이네. 이 일은 앞으로 그들과 시간을 가지고 해결해야 할 것으로 보네. 증거가 없으니 바로 들이댈 수도 없고, 또 전 상선이나 강 상차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 사연이 있지 않았을까 망설여진다네. 환관의 설움은 환관만 알 수 있는 것이라네. 사실 내가 환관만 아니라면… 갖바치도 좋고 심지어 백정이어도 좋으니 환관만 아니었다면, 아라님, 내가 느끼는 이런 열정을… 으음.
이런 서찰 말고, 만나서 한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나.
보고 싶은 아라님께, 방비리 씀
1 조선시대 선잠례는 늦은 봄의 길한 사일(社日)에 지냈으나, 3~4월에는 뽕잎이 싹이 트지 않아 5월 이후로 가변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2 친잠례 행사 때 내외명부에게 주어지는 직책으로 상의, 상궁, 상기, 상전, 상공, 전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