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승려 덕중이 백일장에게
승려 덕중이 백일장에게
1466년 7월 5일
백일장,
내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음을 알려주어 고맙다. 더구나 땡추 백이장을 찾으라는 명이 떨어진 급박한 상황에서 말이다. 보내준 서찰을 읽으면서, 나는 극심한 자책과 번민을 느꼈다. 백팔장 모임이 만들어진 계기는 승려증 없이 끌려가던 ‘나의 개 체험기’가 시초가 되었고, 이후로 모임은 나라의 불교를 되살리고 융성시키는 역할을 잘 해왔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백팔장의 정치적인 손이 어디까지 닿았느냐는 것이다. 어린 왕이 나라와 백성을 이끌기에는 가당치 않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수양대군을 왕으로 세웠노라 믿어왔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기획된 모반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쉬운 예로, 승려 만우는 안평대군을 왕으로 세우려다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다가, 최근 그것이 수양대군을 세우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네 백일장(百一張)은 로 시작되는 세종대왕의 어지 서문을 108자로 수정해서 훈민정음 언해본을 불교서책인 『월인석보』와 묶는 작업을 했다. 당시 자네는 승려가 불교서책을 손질하고 묶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지만, 이는 백팔장이 수양대군에게 요구했던 밀약의 일부를 실행한 작업이었다. 백이장(百二張)은 월인석보에 나타난 형과 아우의 몹쓸 인연을 문종 임금과 현왕의 관계로 재해석 하는 일을 했노라고 말했다. 백장(百張)과 백칠장(百七張) 짝패는 현왕이 저지른 업보 때문에 두 왕자가 죽게 되리라는 것을 소문으로 퍼뜨리는 일을 맡았노라 고백했다. 이런 일련의 조각들을 맞추어볼 때, 정말 우리가 문종 임금의 죽음과 무관한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백팔장과 수양대군 사이의 전령 노릇을 해왔고, 동시에 수양대군 사저의 여종 덕중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여종 덕중과 가까이 지낸 것이 처음에는 백팔장의 지시를 따른 것이었다. 우리가 수양대군에게 전한 신탁은 ‘백성의 소리를 부처에 바쳐야 하는데, 그때 나랏님의 뜻을 적은 훈민정음 어지 서문이 불교의 신성수인 108글자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해법을 찾은 사람이 여종 덕중인데, 훈민정음 원본이 한문으로 되어 있으니, 언문으로 번역하여 108자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수양대군에게 내놓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108자 훈민정음 언해본 어지 서문이 만들어졌다. 여종 덕중이 그렇게 쉽게 문제를 해결한 이유를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다.
얼마 전 나는 과거 여종 덕중이 가꾸던 잠저의 정원에 들렀고, 그곳에서 땅바닥에 묻어 놓은 항아리 안에서 서찰 한통을 발견했다. 그 항아리는 당시 수양대군 댁을 드나들던 귀성군과의 우정을 위해 묻은 것인데, 뜻밖에도 그 안에 임영대군의 서찰이 들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과거 수양대군이 나에게 전하라고 준 서찰을 귀성군이 착각하여 여종 덕중에게 준 것 같다고 했다. 그 사실을 임금도 귀성군도 최근에 알게 되었고, 이 때문에 임금이 귀성군을 보내 나를 찾아다녔다는 것이다. 세상 지리에 어두운 귀성군을 시켜 나를 찾아다니게 한 것을 보면, 진짜 나를 찾을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귀성군은 오늘 있을 친잠례에 참석하기 위해 궐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나에게 전해져야 할 수양대군의 서찰이 여종 덕중의 손에 들어간 셈인데, 그 내용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서찰을 받은 소용 박 씨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아니던가.
백일장, 수양대군과 백팔장의 이름이 함께 들어있는 특이한 형태의 합의서를 내가 보관하고 있다고 했는데, 나는 사실 백팔장으로부터 받은 합의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자네를 보호하기 위해 그 합의서를 자네에게 맡겼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나는 수양대군과 백팔장 사이의 전령 역할을 해왔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가능한 모든 전언을 입으로 전해왔다. 내가 백팔장으로부터 받은 유일한 종잇장은 끝부분에 ‘摠一’이라고 적힌 세종대왕어지 서문뿐이었다. 당시 그것을 받을 때도 ‘덕중이 보관하도록 하여라’는 말만 들었을 뿐, 밀약서라는 말은 들은 적도 없다.
처음에는 그 종잇장을 내가 보관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으나, 얼마 후 여종 덕중에게 주라는 것임을 깨달았다. 정원에서 야생초를 돌보다가 여종 덕중에게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어지 서문 54자를 108글자로 만드는 법을 생각해낼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마음속에 항상 ‘백팔장’을 새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백팔장! 순간, 나는 덕중이 백팔장 모임과 연관이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백팔장이 준 그 종잇장은 여종 덕중에게 건네야 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여종 덕중에게 백팔장이 전한 것이라며 건네주었다. 여종 덕중은 매우 기뻐하며 평생 그것을 잘 보관할 것이라고 했다.
백일장, 나는 여종 덕중과 알게 모르게 얽혀 있는 인연임에 틀림없다. 임영대군의 서찰을 찾아낸 곳은 잠저의 반하라는 야생초 밭의 항아리 속에서이다. 반하꽃이 만발하는 계절이다보니 수년에 걸쳐 번식한 반하가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자네 백일장에게 하는 이유는 이제는 더 이상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진실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여종 덕중의 환심을 사기위해 야생초들을 가져다주었다. 만유처럼, 그녀도 백팔장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임무를 비밀리에 띠고 있다고 여겼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친분을 쌓아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수양대군 댁의 정원에 들렀다가 소용 박 씨와 귀성군이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덕중은 내가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눈 유일한 여자였다. 여자를 가까이하지 못하는 승려의 몸인데, 덕중과 귀성군이 서로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보게 되자 질투 때문에 번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슴이 뛰는 소리 때문에 잠에 잠을 잘 수도 음식을 삼킬 수도 없었다. 억눌러놓았던 욕망들이 무섭도록 싱싱하게 살아나 고행이라 한들 그런 고행이 없었다. 여중 덕중이 궐로 들어가 후궁이 된 후에도 그들의 만남은 간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녀의 정사장면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을 때 받았던 충격을 자네는 이해하겠는가. 외면하려 안간힘을 쓰면서도 그들의 은밀한 모습을 보기 위해 더 자주 잠저로 향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갈등이 극에 달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일 즈음, 여종 덕중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토가 심한 것을 본 나는 입덧에 무엇이 좋은지 알아보게 되었고, 반하의 알뿌리가 거담, 구토, 설사, 임신 중의 입덧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건네준 반하 처방약을 먹었는지 버렸는지, 그 아이가 왕의 아이인지 귀성군의 아이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때는 소용 박 씨의 그런 행동이 맡은 역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고 여긴 적도 있으니 말이다. 부질없는 젊은 날의 번민이었다. 잘못 전달된 서찰과 혼동된 이름 때문에, 백팔장이 말하는 합의서가 누구의 손에 어떤 상태로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짐작이 가질 않는다. 백팔장이 나에게 건넨 그 종잇장이 밀약서가 아닌 이유는 그곳에는 백팔장이라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의 이름도 없었다. ‘총일’이라는 두 글자뿐이었다. 작년 여름, 소용 박 씨 연서 사건 이후로 거의 1년 동안 나는 주상전하께서 백팔장께 보내는 전언도, 백팔장이 주상전하께 보내는 전언도 받지 못했다. 즉 양쪽 모두 만나기를 기피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무슨 연유일까.
내 이야기는 이쯤하고, 백일장 자네와 백이장에 대해 이야기하자. 백이장은 본래부터 땡추두목으로 영혼이 자유롭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그도 백팔장 모임의 역할에 대해 회의하고 있는 듯하다. 대표모임도 참석하지 않고 하지 않고 정식통보도 없이 땡추소굴로 돌아가 버리다니. 그렇다고 백팔장을 배반하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심하여야 한다. 배반이라고 여겨지는 순간, 예기치 않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백일장과 백이장, 자네들 서로에게 함정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덕중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