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백이장(百二張)이 백일장(百一張)에게
1466년 5월 16일
백일장,
오월 말 백팔장 대표 모임에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은 이유가 뭐냐고? 석연치 않는 뭔가가 있어서다. 자네가 보낸 서찰을 읽으면서 흩어져 있는 사건의 진실을 조각조각 나름대로 꿰매어보았다. 우선, 불교를 되살리기 위한 방책으로 새문자를 부처에게 바치게 한 것, 새문자의 세종어지를 불교의 신성수인 108글자로 바꾸게 한 것, 그리고 불교서책의 맨 앞에 넣어 묶게 한 것까지는 이해가 가는 일이다. 하지만 불교서책들 중에 『월인석보』와 묶은 의도는 무엇일까. 하고 많은 불교 서책들 중에 왜 하필 『월인석보』인가. 땡중이 별로 할 일도 없으니, 『월인석보』를 가져다놓고 찬찬히 읽으면서 그 의도를 파악해보았다. 그런데 이런 부분 기억하는가?
옛날, 숫자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멀고 먼 전 세상에서 한 보살이 왕이 되어 계셨는데, 나라를 아우에게 맡기시고 도리를 배우러 밖으로 나갔다. 구담 바라문을 만나니 왕복은 벗고 구담의 옷을 입으시어, 깊은 산에 들어가 과실과 물을 잡수시고 고요히 앉아 참선하시다가, 자기가 왕이었던 나라에 빌어먹으러 오셨다. 사람들이 예전의 왕인 줄을 모두 몰라보고, 그를 구담의 제자라는 의미로 소구담이라 하더라. (보살의 출가)
보살이 성 밖의 사탕수수 밭에 정사를 만들고 불도를 닦기 위해 혼자 앉아 계셨는데, 도둑 오백 명이 관청 재물을 훔쳐 정사 곁으로 지나가니, 그 도둑이 보살의 전 세상 원수이더라. 이튿날 나라에서 도둑의 발자취를 밟아가서 그 보살을 도둑으로 오인하여 잡아들이고 나무에 몸을 꿰어 두었다. 보살의 선생인 구담이 신통한 눈으로 보고 허공에서 날아와 묻되, 그대 자식도 없는데 무슨 죄로 이렇게 죽게 되었는가? 보살이 대답하되, 멀지 않아 죽을 내가 자손을 의논하리요? 보살의 아우인 현왕이 사람을 시켜 활로 형을 쏘아 죽이니라. (수도하던 보살의 죽음)
구담이 슬퍼하며 시체를 염습하여 관에 넣고, 피가 묻은 흙을 파가지고 정사에 돌아와 왼쪽 피를 따로 담고 오른쪽 피를 따로 담아 두고 말하되, 이 도사가 정성이 지극하던 것이면 하늘이 마땅히 이 피를 사람이 되게 하시리라. 열 달 만에 왼쪽 피는 남자가 되고, 오른쪽 피는 여자가 되니, 성을 구담씨라 했다. 이로부터 자손이 이어지니, 구담씨가 다시 일어나시니라. (구담씨 탄생)
백일장,
뭐, 무슨 이야기든지 갖다 붙이면 들어맞게 되어 있는 것이니 하는 말인데, 이 내용을 읽으면서 제법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가설이고 내 상상이니, 탓하지는 말게. 아니 차라리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는 말게. 여기서 보살인 형과 아우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아우가 형 대신 왕이 되고, 아우에 의해 죽은 형은 자손이 없는데도 죽은 피가 다시 사람이 되어 부처의 조상인 구담씨가 되는 것을 보니, 그것이 참, 왠지 현왕의 이야기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백팔장이 수양대군에게 신탁을 주장하며 『월인석보』에 신문자를 묶도록 유도했다면, 이 속에 백팔장이 수양대군에게 보낸 중요한 전언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짝패 사이에 빙빙 돌릴 것 없이 그대로 말하면, 수양대군에게 형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린 것이 아닌가 말이지. 일부러 살생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 세상의 업보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암암리에 세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수양대군의 형인 문종은 병으로 죽었으니, 이런 헛된 상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보살인 죽은 형의 피가 나중에 부처의 조상인 구담씨가 된다는 것은, 형님 문종의 피가 왕위를 이어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 이는 수양대군을 설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이구먼.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형의 피가 왕위를 이어가게 된다는 것은 다시 역모가 일어나 왕위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내용을 그대로 수양대군이 받아들였을 리가 없고, 그런 운명을 바꾸려고 무엇인가 했을 수도 있다. 이런 저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다가 자네가 백장과 백칠장 짝패에게서 들은 대화가 떠올랐다.
“두 왕자를 잃어야 업보가 끝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현왕이 저지른 죄의 응보로 두 왕자가 죽게 되었다고 적지 않았나. 업보로 두 왕자가 죽었다면, 그런 업보에 해당하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조카인 어린 왕을 죽인 해에 자신의 아들인 의경세자가 죽었으니, 더구나 같은 해 한달 사이로 죽었으니 업보라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왕자라면, 나머지 한 왕자는 누구를 말하는가? 죽은 다른 왕자로는 소용 박 씨의 소생인 아지 왕자군이 있다. 한데 아지 왕자군의 죽음 때문에 업보가 끝나지 않고 다른 업보가 생겼다… 죽어야 하는 사람은 다른 왕자인데 아지 왕자군이 대신 죽었다는 이야기인가. 적손으로 다른 왕자는 해양세자뿐이다. 해양세자가 죽어야 업보가 끝난단 말인가. 해양세자는 차기 왕이나 다름없는데! 현왕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적손으로 하나 남은 해양세자의 목숨을 내놓아야 업보가 끝난단 말인가.
백일장, 추곡사의 범종소리가 들리누먼.
항간에는 새 문자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의 수가 28자인 것은 바로 범종소리 28개를 본뜬 것이고, 새 문자는 불교 전파를 위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니 참으로 괴이쩍다. 불교의 위세가 커지니 전부 갖다 붙이는 것이지만, 어찌 타종 수에 맞추기 위해 자음과 모음의 숫자를 28개로 만들었단 말인가. 음운이나 발음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나도 엉터리 주장인 것을 알겠는데, 어찌 현명한 사람들조차 진짜인 양 받아들이는지 모르겠다. 생각인들 무엇을 못할까. 갖다 붙이면 다 맞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말인 것을.
어디 그뿐인가. 최근 108글자가 화두가 되자, 임금이 28자를 27자로 바꾸라고 학사들에게 명했다는 말도 돌고 있다. 108글자의 반절인 54자, 54자의 반절인 27자로 꿰맞추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어이가 없다. 발음상 필요치 않거나 혼란이 있어서 자모음의 수를 줄이려고 하는 것이겠지, 어찌 이런 학문적인 사실까지 모두 불교에 갖다 붙이는가. 하기야 사람들을 탓하면 무엇 할까. 그들만큼이나 내 말도 터무니가 없는 것을.
결론적으로, 나는 백팔장 대표 모임에 참석하지 않겠다.
짝패라기보다 친구로서 이해해주기 바란다.
백이장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