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환관 방비리가 잠녀 고아라에게
1466년 5월 15일
자네가 나에게 서찰을 보낼 때는 조심한답시고 답신을 쓰지 않았는데, 내가 서찰을 쓰기 시작하자 자네가 회신을 보내지 않으니! 마음이 답답하고, 몸에 열 같은 것이 오르면서 안달이 나는 것은, 으음, 날씨가 따뜻해지니 계절 탓인가. 마음 둘 데가 없어, 원유의 뽕나무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보았다네.
오랫동안 내잠실에서 근무하다보니, 뽕나무에 대해 제법 지식을 가지게 되었네. 뽕나무는 하늘에서 내렸다 하여 신목이라 하는데, 신들 이야기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나무가 바로 뽕나무인 상(桑)이라네. 인간이 신으로부터 받은 여러 선물 중에서 그 첫 번째가 옷이라고 하더만. 바로 입을 수 있는 옷을 준 것이 아니라 옷을 만들 수 있는 나무를 주었으니, 그것이 뽕나무라는 것이지.
뽕나무를 처음 관장할 수 있었던 사람은 중국 황후인 누조로 우리가 뽕의 여신으로 모시는 이지. 중국에서는 상림에 뽕나무 신을 모신 사당을 만들고, 그 사당 앞에 으음, 남성의 상징을 닮은 길쭉하고 날씬한 돌을 제단 위에 세워놓고 제사를 지냈고, 사람들이 몇 일간씩 춤과 음악과 음식과 술로 함께 즐기고 지샜다네. 이때 자신의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마음껏 고를 수 있었는데, 출신의 높낮이도 없고 신분의 차이도 없고 오로지 심장을 뛰게 만드는 사람을 찾아 접근했다는 것이지. 그리고 그곳에서 으음, 야합을 벌였네. 남자와 여자로 만나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이가 바로 공자님이라고 하더만. 만들어진 이야기인지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뽕나무 아래서 만난 짝은 하늘이 맺어준 짝이라 한다는구먼.
궐 밖에서도 서로 모르던 남녀가 정을 나누는 장소로 뽕나무가 많은 상림을 이용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전설 때문이 아닌가 싶네. 뽕나무 아래에서는 신분이나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모 남자와 모 여자가 있으면 천지지합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있으니 말일세. 더구나 모(某)라는 한자를 보면, 나무 목(木) 위에 달 감(甘)이 놓여 있는 격인데, 달감은 바로 뽕나무 열매인 오디로 담근 술을 의미한다고 하더구먼. 그러니까 오디로 담근 술을 먹고 뽕나무 아래서 사랑을 나누면 더없이 좋은 짝이 된다는 이야기이지, 으음, 그냥 잠실에서 일하면서 들은 이야기들이니, 마음 쓰지 말게.
우리 조선도 종묘와 사직 등 모든 제사는 남자들의 영역이지만, 오로지 뽕나무와 관련된 모든 행사와 제사는 여자들이 주관하고 있지 않나. 이번 친잠례의 최고 책임자는 당연히 중전마마이시네. 요즘 중전마마가 뽕나무를 따실 때 사용할 채상단을 군사들과 함께 쌓고 있는 중이라네. 중전마마뿐만 아니라, 내명부로 세자빈이나 후궁 그리고 궐 밖에 사는 외명부로 옹주나 각 승지의 부인도 친잠례 행사 때 뽕잎을 따는 채상녀가 될 수 있지 않나. 친잠례 당일, 중국처럼 신분의 차별 없이 술을 마시고 야합을 벌일 수는 없지만, 대신에 주상전하께서는 궐 안 뜰에서 의정부나 육조당상 그리고 종친들에게 음식과 술을 베풀어주시지 않나.
아라님, 이렇게 서찰을 쓰는 이유는,
내가 원유의 뽕나무밭을 산책하다 쉬면서 친잠례 광경을 그림으로 남겨놓은 친잠례도를 살펴보게 되었기 때문이네. 뽕나무밭의 구조와 친잠례 때 자리 배치 등을 보다가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네. 자네가 바늘 표시를 남겼던 뽕나무의 위치가 혹여 채상단 뒤쪽의 왼쪽에서 일곱 번째 뽕나무가 아닌가. 예전 친잠례도를 보니, 그 자리는 바로 귀성군이 서 있던 자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그러니까 과거에 소용 박 씨는 중전마마와 함께 채상녀로써 그날 행사의 주역을 담당했고, 귀성군은 그런 모습을 구경하였다가 나중에 주상전하께서 베푸시는 주연에 참석하곤 했던 것이지. 얼마 전 뽕잎이 나기 시작하길래 바늘로 뽕잎에 글자를 새겨 그 결과를 주시해왔네. 그랬더니 처음에는 눈에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며칠 지나니 구멍이 난 부분이 마르면서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에 글자가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더구먼. 그러니까 귀성군이 그 뽕나무 위치에 서도록 되어 있었다면, 그는 그 뽕잎을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었고, 찾아서 그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자네에게 남겨진 서찰은 귀성군에게 전해져야 할 것임이 거의 틀림없는 것 같네. 귀성군이 작년에 그 뽕잎을 가져가지 못한 이유는 소용 박 씨 연서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주상전하께서 친잠례에 참석하시지 못하셨고, 누에의 여신에게 제향하는 의식인 잠령제1도 생략했기 때문이네. 종친들이 행사에 참여할 수 없으니, 귀성군도 올 수 없었던 것이지. 원유는 금원이니, 그 뒤로도 귀성군이 함부로 올수 없는 상황이었네. 그런데 우연히 중간에서 강 상차가 그 뽕잎을 가로챈 셈이지.
자네가 지니고 있는 서찰을 귀성군에게 전해주면 소용 박 씨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니, 곧 홀가분해질 것이네. 그런데 어떻게 귀성군에게 그 서찰을 전한단 말인가. 소용 박 씨의 서찰을 귀성군에게 전하려다가 다섯 사람이 목숨을 잃었네. 그 서찰을 귀성군에게 제대로 전한다 해도, 끔찍한 일이 되풀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나. 귀성군이 또다시 아버지 임영대군에게 그 사실을 고하고, 임영대군이 아들을 데리고 그 서찰을 다시 임금에게 가져다 바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러면 또다시 같은 일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일이네. 서찰을 전한다 해도,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도무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네.
우리가 귀성군에게 직접 서찰을 전달하지 않고, 소용 박 씨가 시키는 대로 간접적으로 전달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작년처럼 동일하게 그 나무에 정해진 날짜에 바늘구멍을 내고 기다려봄세. 귀성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에 따라 우리가 대응하면 되지 않겠나. 우리는 아직 뽕나무에 새긴 글자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했지만, 그 글자를 가로챈 강 상차는 알고 있는 듯하니, 조만간 만나서 그 의미를 알아내면 다른 방도가 생길지도 모르겠네. 더구나 그 뽕잎이 전 상선의 손에 들어갔다니,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이네. 왜 그런 바늘구멍을 냈는지 자네가 불려가서 질문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니, 의심을 사지 않을 대답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이란 말이지.
부탁이 있는데, 으음,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답장을 주게나.
방비리 보냄
1 사람들에게 비단과 건강을 주기 위해 자신의 생을 못다 한 채 죽어가야 하는 수많은 누에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한 제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