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임영대군이 귀성군에게
1466년 5월 10일
내 아들 준아1,
세종 할아버지는 첫 부인인 소헌왕후에게서 여덟 왕자2를 보셨다. 두 분이 살아 계실 때 다섯째 광평대군과 일곱째 평원대군이 갑자기 병으로 명을 달리했으니, 여섯 왕자가 남았다. 첫째 아들은 문종 임금이시고, 둘째가 수양대군, 셋째가 안평대군, 내가 네 번째 왕자이고, 여섯째가 금성대군, 그리고 막내 왕자가 영응대군이 아니냐.
문종 임금이 재위 2년여 만에 병사하시니, 그 아들 홍휘가 12살에 왕이 되었다. 국정을 이끌기에는 너무 어렸고, 결국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싸움으로 그 권력이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은 왕자들은 선택해야만 했다. 막내 왕자인 영응대군은 권력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피바람에서 비켜날 수 있었지만, 나와 금성대군은 두 권력다툼 사이에서 입장을 정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에 서야 했겠느냐? 수양대군? 안평대군?
준아! 금성대군은 형제들보다 어린 조카를 선택하여,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나는 강한 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내 목숨도 목숨이려니와, 나는 내 눈앞에서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나는 수양대군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좋게 말하는 사람들은 미래를 내다보는 식견이 있다고들 했고,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내 안위와 가문의 영달을 위해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고들 했다. 나는 너를 살리기 위해 그를 선택하였다. 왜냐고? 네가 수양대군의 볼모로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어린 시절에 무술을 배운답시고 수양대군 댁에서 거의 살다시피 해야만 했다. 수양대군 댁의 장정들에게 무술을 배운다는 명복이었지만, 그 우락부락한 무술선생들이 바로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수양대군의 또 다른 ‘눈’이었던 것이다.
물론, 수양대군은 왕이 되고 나서 나를 전폭적으로 믿고 의지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 많은 형제들 중에 그래도 자신의 편이라고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형제들을 죽여야 했으니 민심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왕의 입장에서, 형제인 내가 자신을 지지해주었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죽이면서, 네 숙부인 현왕은 자신의 조카들까지 죽였다. 너는 그를 따르는 거의 유일한 조카였기 때문에 되도록 가까이 두어, 사람들에게 형제와 조카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현왕은 나와 네가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에 따라 가차없이 목을 칠 준비가 되어 있다.
네가 절을 떠돌며 긴 서찰을 몰래 보내왔을 때,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네가 소용 박 씨와 그런 관계인 줄도 모르고, 중전의 계략인 줄도 모르고, 나는 중전이 정해준 날짜와 시각에 너를 잠저로 보냈던 것이다. 잠저의 집사가 너에게 건네주는 것을 가져오라고 시켰던 것이다. 아마 중전이 나를 왕에게 더 꼼짝 못하게 묶어놓기 위해 여러 가지 계략을 꾸몄겠지만, 후궁을 이용해 너까지 유혹했다고 생각하니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는구나. 설마 중전이 일부러 그런 일을 꾸몄을까 의심이 들겠지만, 김종서 장군을 죽이기로 했던 날 수양대군이 마지막까지 망설이고 있자, 손수 갑옷을 입혀주며 나가서 큰일을 하라고 부추긴 사람이 바로 숙모였다. 겉으로는 온화하고 자상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야심과 계략이 숙부인 현왕을 넘어선다는 것을 너는 잘 모를 것이다. 네가 잠저에서 가져온 호리병 안에는 거머리가 들어 있다고 했다. 중전 말로는 왕의 피부병에 사용하게 될 것이라 했다.
네가 소용 박 씨의 서찰을 내 앞에 들고 나타났을 때, 눈앞이 캄캄했다. 주상전하가 네 뒤에 항상 미행을 딸려 놓았고, 중전은 소용 박 씨 뒤에 항상 미행을 딸려 놓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용 박 씨가 너에게 서찰을 보냈다는 사실은 이쪽을 통해서건 저쪽을 통해서건 반드시 알려지게 되어 있었다. 아니면 환관이나 궁녀가 발설해서라도 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알게 마련이다. 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즉시 입궐하여, 소용 박 씨의 일방적인 접근 때문에 네가 도리어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내 의도가 왕에게 먹혀 든 것은 다행이었다. 이 모든 것을 즉시 와서 고변하고 상의했다는 점에서, 왕은 우리를 기껍게 여기신 것이다. 다행히 우리의 목숨은 건지게 되었다. 물론, 그때는 내가 너와 소용 박 씨와의 관계를 몰랐으니, 나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전은? 중전은 너와 소용 박 씨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겠느냐. 무서운 일이다. 소용 박 씨가 너에게 서찰을 보낸 것이 들통이 났을 때도, 이 때문에 소용 박 씨가 처형 되었을 때도 중전은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고, 지금도 마치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다. 도대체 중전의 속마음에 무슨 꿍꿍이가 들어 있단 말인가.
준아, 수양대군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과정을 잘 생각해보아라. 당시 왕좌에 너무나 어린 왕이 올랐고, 그 곁에는 장성한 삼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지금 상황을 그때에 대비시켜 보거라. 세자에게는 갓 태어난 젖먹이 왕자가 있을 뿐이다. 이제 막 한살이 되었으니, 만약 세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왕손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앞서 어린 왕이 열두 살에 왕좌에 올라 그런 참극을 빚었으니, 앞으로 12년 사이에 세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어린 왕손에게 가장 위협적일 수 있는 삼촌이 누구냐. 바로 너다. 너는 무과에 급제한 장성한 삼촌이다. 과거 상황이 그대로 재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왕이나 중전이 꿰뚫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와 나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존재기이도 하다. 갓 태어난 젖먹이 왕자를 네가 위협할 수도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아비는 왕과 중전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옮겨 놓을 생각이다. 최근 중전이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군의 짝으로 박중선의 딸을 정했다고 들었다. 왕과 중전의 입장에서 보면, 첫 아들인 의경세자를 잃은 아픔이 클 것이고, 그 아들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의경세자가 죽지 않았다면, 왕위 계승은 당연히 의경세자의 아들이 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이 쑥쑥 자라나고 있다. 어쩌면 중전은 막 태어난 젖먹이 왕자보다, 이미 훤칠하게 자란 의경세자의 아들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연민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가령, 월산군이 혼례를 올리고 난 후, 일이 년 안에 왕손이라도 생산해보아라. 그 위치는 바로 지금 젖먹이 왕자와 숙부인 너와의 대결이 아니라, 지금 세자인 해양세자와의 대결이 될 만큼 위상이 높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젖먹이 왕자의 왕위를 위협하는 것이 네가 아니라 월산군과 자을산군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또 한 가지 변수가 있다. 한명회가 둘째 아들 자을산군의 짝으로 자신의 딸을 들이밀고 있는 상황이다. 벌써 해양세자에게 딸을 바쳤던 한명회가 또다시 자을산군의 짝으로 또 다른 딸을 바치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 말라비틀어진 몸 안에 얼마나 겹겹이 권력욕이 숨어 있는지 상상하기조차 싫구나. 해양세자에게 바친 딸은 이미 죽고 한백렴의 딸이 세자빈이 되었으니, 만약 자을산군의 짝으로 한명회의 짝이 맺어지면 아주 볼만한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한명회와 한백렴, 공교롭게도 한씨 가문들의 치열한 왕위 다툼이 벌어질 것이다. 한명회의 딸이 자을산군의 짝이 되는 것이 흔쾌하지 않지만, 왕이나 중전의 걱정이나 의심을 월산군이나 자을산군에게로 돌리도록 만들기 위해 한명회의 제안에 동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래야만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그들의 싸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준아, 정신을 바짝 차려라.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에게 물려도 살아남을 수 있다. 너는 소용 박 씨의 연서사건을 겪으면서도 살아남게 된 연유를 잘 모를 것이다. 왕이 너를 죽이게 되면, 앞서 다른 조카를 죽였을 때보다 더 치욕적인 감정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형제들을 죽일 때에는 권력 다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이번에 연서 때문에 조카를 죽이게 되면, 오죽 무능했으면 왕이 후궁을 조카에게 빼앗기느냐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왕이기 이전에 남자로써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왕을 지지한 형제이자 조카이다. 형제와 조카를 이렇게 가까이 두고 사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나와 너이다. 그러므로 왕은 우리를 쉽게 버리거나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건강 조심하고, 이 서찰을 받는 즉시 읽고 없애버리도록 하여라.
아버지가
붙임 말: 소용 박 씨가 환관을 통해 너에게 보냈던 서찰 내용에는 자신이 죽기 전에 꼭 한번 만나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자신의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너에게 꼭 알려야 하는 일이 무엇이라는 말이냐.
1 귀성군의 이름이 이준이다.
2 세종대왕에게는 정처에서 난 8명의 왕자 향(문종), 유(세조), 용(안평대군), 구(임영대군), 여(광평대군), 유(금성대군), 임(평원대군), 염(영응대군)과 두 명 정의공주와 정소공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