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귀성군이 임영대군에게
귀성군이 임영대군에게
1466년 5월 1일
아버님, 강녕하신지요?
입궐하여 주상전하와 독대한 후, 제가 귀가하지 않은 이유를 들으셨겠지요. 주상전하께서 제 얼굴이 너무 창백하고 몸이 부실하다 하여 절에서 머물면서 요양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당장 절로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버님도 그렇게 전달받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아버지, 저를 용서하지 마옵소서. 소용 박 씨 연서사건이 있고나서. 아버님께서는 두 사람 사이의 진실이 무엇인지 몇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연서를 보낸 것은 제가 아니라, 과거 수양대군 시절 숙부의 연서를 덕중에게 전한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버님, 이번 주상전하와의 독대 과정에서 저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수양 숙부가 정원에 가면 덕중이 있을테니 그 서찰을 전하라고 했을 때, 저는 당연히 그 덕중이 여종 덕중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알고 보니, 그 서찰은 여종 덕중이 아닌 승려 덕중에게 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승려 덕중은 자주 수양 숙부댁에 드나들었고, 심지어 보름이나 한 달씩 머물다 가지 않았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숙부가 조카를 시켜 연서를 여종에게 전달할 리 없다는 사실이 새삼 깨달아집니다. 그런데도 당시 저는 무엇에 홀린 듯 그 여자에게 그 서찰을 건네주고 말았습니다. 그 서찰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저는 모르고, 주상전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수양 숙부가 승려 덕중에게 전하려고 했던 내용을 여종 덕중이 중간에서 보게 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사실을 저도 주상전하도 여태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서찰을 여종 덕중에게 전했다는 사실을 아신 주상전하께서는 한동안 하실 말을 잃으시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듯도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아버지도 알고 있느냐고 물으시길래, 당시 저는 숙부께서 여종에게 마음을 두신 듯해서 그런 고자질을 할 수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당장 길을 떠나 절을 돌아다니면서 승려 덕중을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어명으로 찾으면 금방 찾을 사람을, 저처럼 절의 위치나 지리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렇게 절을 돌아다니면서 그를 찾으라는 이유는 제 몸이 워낙 허약하니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명하는 것이니 편한 마음으로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대신 어명이 있을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말고 계속 절을 돌아다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버님, 저는 귀성군 신분을 숨기고 범부의 옷을 입고 이 절에서 저 절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승려 덕중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신분을 숨긴 채 함부로 승려의 행방을 묻고 다닐 수 없는 처지여서, 그를 제대로 찾아낼지도 의문입니다. 주상전하의 말씀대로 그를 찾기보다 심신이 허약해진 저를 다시 찾는 것이 우선인 듯합니다. 아버님, 초록의 신선한 공기로 가득한 산속을 걷다보니, 그동안 제 마음을 어지럽혔던 여러 가지 정념이나 욕심이 허황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막 과거 무과에 급제하여 이제 세상에 나가 내 뜻을 펼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에, 연서 사건이 터져,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와 덕중 사이에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지에 대해 아버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는 듯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버님, 저를 용서하지 마옵소서. 무슨 이야기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궐 안에서 대군들과 군들이 모두 모여 토끼잡이를 하지 않았습니까. 대군들과 군들이 몸이 허약한데도 많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중전마마의 말씀을 들으시고, 주상전하께 특별히 마련한 사냥대회였습니다. 대회에 참여하기 전에 중전마마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번 대회는 토끼가 목적이 아니라 왕자와 군들이 몸을 많이 움직이기 하게 위한 것이니, 되도록 토끼가 금방 잡히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토끼를 풀어주지만 곧 병사들이 도로 잡아 잠실에 넣어둘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토끼를 그곳에 두면 굶게 되니 중간에 잠실에 들어가 토끼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비밀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병사들이 다시 그 토끼를 바깥에 풀어놓을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적당한 때에,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잠실 쪽으로 갔습니다. 토끼 먹이는 잠실 입구 벽 쪽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잠실은 어두운데다가, 토끼라는 것이 고양이처럼 울음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고 닭이나 개처럼 기척을 하는 동물이 아니어서, 어디서 토끼를 찾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씩 발을 내딛는데 갑자기 무슨 기척이 났고 놀라서 작게 소리치니, 저쪽에서도 작은 비명을 올렸습니다. “누, 누구냐?” 저는 더듬거리며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쪽에서는 비교적 당당한 목소리가 대꾸를 했습니다. 나는 소용 박 씨다. 너는 남정네인 듯한데 어이하여 이 잠실에 허락도 없이 왔더란 말이냐. 소용 박 씨라면 옛날 덕중의 정원에서 같이 토끼를 잡던 여인이 아니옵니까. 비록 여종이지만 왕의 후궁이 되었으니, 저에게는 숙모가 된 것입니다. 귀성군이라고 밝혔더니, 그쪽에서도 놀라는 듯 했습니다. 토끼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왔다는 말을 하면 중전마마와 약속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토끼를 잡기 위해 뛰어다니다보니 덥고 게다가 다른 어린 왕자가 상을 타도록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 피신을 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용 박 씨는 그러냐며 작게 웃었습니다. 소용 박 씨는 원유에 온 김에 곧 시작될 양잠을 위해 잠실을 한번 둘러보러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 잠시 서 있었는데 서로의 표정을 보면서 민망해 할 필요도 없었고, 그곳에 그렇게 있자니 편안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소용 박 씨는 제가 어색하지 않게 숙모로써의 태도를 잘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소용 박 씨가 화들짝 비명을 질렀습니다. 뭔가가 자신의 발을 타넘어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토끼를 떠올렸습니다. 소용 박 씨는 그곳에 토끼가 있는 줄을 모르고, 부드럽고 물컹한 것이 자신의 발을 타넘고 갔으니 쥐라고 여긴 듯 했습니다. 너무 놀라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급하게 “토, 토끼다”라고 말했습니다. 소용 박 씨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며, 토끼가 쫒기다 쫓기다가 갈 곳이 없어 이곳까지 온 것 같다며, 가여우니 숨겨주자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때부터 정말 토끼가 있는지 어둠 속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손에 잡힐 듯 털이 닿았던 토끼를 따라 이리저리 같이 뛰어다녔습니다. 과거 수양 숙부의 정원에서 제가 서찰을 건네주고 토끼를 같이 잡던 시절이 생각이 나면서, 서로 손끝이 스치고 몸이 닿을 때마다 기분이 묘해졌습니다. 두 사람의 몸은 흠뻑 젖었고 숨이 가빴습니다. 어느 순간, 소용 박 씨의 몸과 제 몸이 부딪혔고, 소용 박 씨의 작은 몸이 제 가슴에 안겨 들어왔습니다. 앞가슴의 뭉클한 감촉이 느껴지자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 다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아버님께는 죽을죄를 지었다는 소리밖에 드릴 말이 없었습니다.
아버님, 저를 용서하지 마옵소서. 소용 박 씨와 제가 잠실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 멀리서 사람의 소리가 나는 듯 했습니다. 소용 박 씨는 양잠 도구가 들어있는 창고 뒤쪽으로 숨었고, 저는 그때 마침 손에 들어온 토끼를 쥐고 문 쪽으로 급하게 다가갔습니다. 잠실 문이 열리자 관원 한명이 서 있었습니다. 중전마마의 밀명을 받고 토끼를 밖으로 내놓기 위해 온 듯 했으나, 내 손의 토끼를 보자 큰 상을 타게 되었다며 저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토끼를 놓아주어 다른 왕자들이 잡게끔 해주어야 하는데, 관원은 서둘러 주상전하께 제가 토끼를 잡았노라고 고해버렸습니다. 결국, 상으로 제가 황금토끼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중전마마로부터 들은 설명은, 조카가 상을 타는 것이 아들이 상을 타는 것보다 사람들 눈에는 더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 소용 박 씨를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몇 번 더 있었습니다. 잠실에서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남자로써 견딜 수 없는 열정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왜 그때 그런 욕정에 휩싸였는지는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아마 몰래 여인을 만난다는 사실이 저를 흥분시켰고, 더구나 왕의 여자를 안는다는 것이 사내로써 우월감을 느끼게 했던 것 같습니다. 왕도 기쁘게 해줄 수 없는 여자를 내가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미치도록 만들었습니다. 잠실에서 그 사건이 있고나서, 소용 박 씨는 중전마마의 심부름으로 잠저로 가끔 나왔습니다. 소용 박 씨가 잠저로 나오는 날에는 거의 어김없이 제가 그곳에 가게 되었는데, 아버님 역시 저에게 잠저 심부름을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이 알고 하신 일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중전마마의 명에 따라 아버지가 저에게 명하신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잠저에 가면 덕중의 정원에 들르게 되었고, 한적한 잠저의 정원에서 소용 박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소용 박 씨와 헤어질 때마다, 소용 박 씨는 저에게 나뭇잎을 하나씩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다음 번 만나게 될 때는 그 잎사귀가 달린 나무부근으로 오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잎에 바늘구멍이 있어 잎이 마르면 숫자가 나타나곤 했는데, 그 잎사귀가 달린 나무가 바로 몇 번째 나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나뭇잎에 적힌 나무를 찾는 것 자체가 놀이여서, 소용 박 씨를 만날 생각만 해도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곤 했습니다. 이런 불장난은 소용 박 씨가 임신을 하고 궐 밖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끝이 났습니다. 소용 박 씨가 회임을 하자 여자로써의 매력이 금방 사라져버렸고, 숙부가 알게 될까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소용 박 씨와의 관계는 끝이 나고 다 잊힌 관계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나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감지했는지, 소용 박 씨도 궐 안에서 나를 아는 척도 잘 하지 않았습니다.
소용 박 씨가 환관과 궁녀들을 통해 저에게 서찰을 보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나뭇잎으로 그 뜻을 전했기에 사람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버젓이 아랫것들을 시킨 것이 예외적이었습니다. 아마 이태 전에 잃은 아지 왕자군 때문에 충격을 받고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분명합니다. 서찰에는 꼭 나에게 할 말이 있으니 한번 만나야한다는 것이었고, 그곳에 백팔장이라는 글귀가 들어있지 않았습니까. 백팔장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죽어가면서 백팔 글자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 것을 보면, 저에게 하려고 했던 것이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버님, 이렇게 길게 서찰을 쓰는 것은 이 불효자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말씀드린 것처럼, 제 뒤를 항상 미행하는 자들이 있으니 이 서찰을 아버님께 전달하면 이 또한 아버님께 문제를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언제 어떻게 전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혹여 제가 죽고 나서 전달될지, 영원히 묻혀 버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뵙게 될 때까지 강녕하시기 바랍니다.
아들 귀성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