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정희왕후가 세희공주에게
1466년 4월 28일
세희야,
살다보니, 결국 네 소식을 들게 되는구나. 너는 이미 세상에서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다. 네가 죽었다고 장사를 치르고, 선원록에서 네 이름을 지운지도 오래되었다. 그런데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눈물이 쏟아지고 몸이 흔들려 걸음조차 제대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충청도 산속 깊숙한 곳에서 몸을 보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네 유모가 전해왔구나. 늙어서 공주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공주가 살아 있다는 것과 좋은 낭군 만나 아들까지 낳고 산다는 것을 전해주어야만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 같아서, 서찰을 보내는 것이라 했다. 그 서찰을 가지고 온 것은 너도 잘 아는 보명상궁이었고, 보명상궁은 또 다른 이를 통해 그 서찰을 전달받았다고 했다.
세희야,
너는 본래 마음이 착하면서도 그릇된 것을 잘 참아내지 못했다. 조카 홍위1를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유배를 보내는 것을 보고, 너는 아버지 침실 앞에 가서 눈물로 간청했다. 상왕을 유배하는 것은 왕가의 폐도로써 민가에서도 있어서는 안 되며, 이미 왕좌를 차지하셨는데 무슨 영화를 더 누리려고 스스로 왕좌를 내놓은 어린 조카를 역적으로 몰아 유배를 보내려고 하느냐고, 내가 들어도 정말 가슴 서늘한 진언을 하고 말았다. 비록 네가 장녀로써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나, 아버지는 이미 왕좌에 오른 왕이었다. 차마 왕으로써는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게다는 너는 해서는 안 될 마지막 말까지 하고 말았다. 유배 보낸 어린 조카에게 내릴 다음 수순이 무엇이냐, 바로 사약을 내려 죽이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세희야, 아버지는 한 나라의 왕이시다. 왕에게 그런 언사를 쓰는 것은 역모의 무리일 수밖에 없다. 왕은 진노하여 궐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하셨지만, 다행히 침전 앞이라 환관 전균 외에 그것을 들은 이가 없었다. 내가 그때 밤새 너에게 잘못했다고 사죄하라고 일렀지만, 옳은 것은 아무리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다며, 너는 그런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를 전해들은 왕은 드디어 이성을 잃고 말았다. 다음날 다시 그 죄를 물어 아예 죽음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어미로써, 아버지와 딸, 왕과 공주의 그 엄청난 갈등 앞에서 어떤 결정을 했겠느냐. 날이 새면 왕은 대신들과 너의 문제를 논하게 될 것이고, 싫어도 할 수 밖에 없는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패물을 챙겨 줄 테니, 유모와 궐 밖에 나가서 살라고 너를 설득했다. 너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다. 네가 죽게 되면 나도 평생 죄인의 어미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을 때, 마침내 너는 내 무릎에 고개를 묻고 흐느끼며 내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네가 떠날 때, 너는 이제 죽은 사람이니 차후에도 다시는 궐로 돌아오지 말라고 나는 명했다. 그렇게 너는 새벽녘에 몰래 유모와 궐을 빠져나갔다.
너를 잃은 슬픔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네가 밤사이에 갑자기 죽은 것을 아버지에게 믿게 만들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자칫 들통 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내 목숨도 네 목숨도 잃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생애 그렇게 온몸으로 거짓 연기를 한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며칠 동안 먹지 못하고 정신적인 고통으로 심신이 약해진 공주가 아침에 깨어나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으나, 네가 자살한 것 같다는 어조로 말씀드렸다. 선왕을 유배하는 것에 대해 공주가 저항하다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왕으로서는 덕과 신망을 모두 잃고, 자칫하면 백성의 마음이 완전히 왕에게서 돌아서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공주가 죽은 것을 확인한 유모가 책임추궁을 당할까봐 궐 밖으로 도망을 가버렸다고 아뢰었다. 되도록 아무 일도 없는 것으로 덮고 넘어가야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해서 네가 몸이 허약하여 간밤에 갑자기 죽게 된 것으로 발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진실을 아시는지 모른 척하시는지 그렇게, 네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거의 10년의 세월이 흘렀구나. 네가 살아있을지 아니면 비관하여 진정 자살을 택했을지, 이 어미는 얼마나 슬프고 괴로운 나날을 보냈는지 모른다. 꿈에서 네가 쫓겨서 달아나는 모습을 보았고, 달아나다 무지막지한 남정네들에게 몸을 더럽히는 것도 보았고, 아버지가 군사를 풀어 너를 끝없이 쫓는 것도 보았고, 잡혀 와서 눈앞에서 목이 잘리는 것을 보기도 했다.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놓고 사는 세월이었다. 그런데 네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다니, 야합2해서 아들까지 낳고 산다니 어미로써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유모 말로는, 네 지아비가 천한 옷가지에 가려 있기는 하나 기품 있고 박식하다고 하니, 좋은 가문의 자제가 피치 못할 사연으로 산골에 숨어 들어온 것이 아닌가 싶다. 너도 그에게 공주라는 신분을 숨기고 유모도 노모라 부르며 살아간다고 하니, 어쩌면 그도 정난이나 대란으로 가문이 망한 유서 깊은 혈통의 자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렇지 않다면 산속 깊은 곳에 혼자 그렇게 와서 숨어 살다가, 숨어 살려고 산에 온 너를 만날 일이 없지 않겠느냐. 아들이 낳았다니 내 외손주가 되겠구나.
유모는 네가 사는 곳이 충청도 산속 깊은 곳이라고만 밝혔다. 그런데 멀지 않는 절에 갔다가 귀성군을 보게 되었다고 적었더구나. 유모는 우리가 궐로 들어가기 전 사저에서부터 너를 돌봐온 이가 아니냐. 임영대군과 귀성군이 자주 우리 집에 들렀으니, 세월이 지났지만 유모는 귀성군을 분명 알아보았을 것이다. 너는 소문을 들을 기회가 없겠지만, 덕중이 귀성군에게 연서를 써서 장안이 발칵 뒤집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너도 옛날 그 여종 덕중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건으로 덕중은 목숨을 잃었지만, 귀성군은 살아남았다. 그 뒤로 귀성군이 여러 절을 돌아다니는데, 무슨 연유인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덕중이 어릴 때부터 귀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항간에는 네 아버지와 덕중 사이에 꿩에 얽힌 사랑이야기가 전설처럼 퍼져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꾸며낸 것이다. 아버지가 왕이 되어 궐로 들어갈 때, 이 어미는 여자로써 고민이 많았다. 지아비가 일국의 왕이 되는 영광을 누릴 수는 있으나, 궐 안의 꽃송이 같은 궁녀들이 시시각각 성은을 기다리며 엿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아라. 이 어미는 그 해결책으로 덕중을 궐로 데리고 들어가 아버지로 하여금 후궁으로 삼게 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덕중은 얼굴이나 몸은 눈을 끌지 못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다. 나무나 짐승을 사랑하는 여자인데, 그런 자연의 힘을 아는 탓에 사내들에게 부담이 없으면서 연정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는 듯하다. 덕중을 아버지의 후궁으로 삼게 한 것은 덕중의 마음에 이미 귀성군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덕중을 아버지의 후궁으로 삼게 한 것은, 아버지가 다른 여자들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왕이 되어도 완전히 여자의 마음을 다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해 남자는 묘한 정복욕에 사로잡히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여자는 돌아볼 여력이 없는 것이다. 남자란 그런 존재다. 내 입장에서는 지아비가 다른 여자를 안는 것보다 덕중을 안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할 수밖에 없다. 내가 덕중을 이용한 것 같지만, 내버려두었다면 덕중은 아마 귀성군의 노리갯감으로 지내다가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덕중은 후궁이 되었으니 내가 이용했다고만 생각할 것은 없다. 더구나 귀성군과 덕중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사랑을 은밀하게 돌봐주기까지 했다. 그 이야기는 이 서찰에 담을 내용은 아닌 듯하구나.
이런 이야기를 너에게 하는 것은, 부근에 귀성군이 나타났으니, 혹여 잘못 엮여 너희들의 신상이 위태로워지거나 사는 곳이 들통이 날까 해서 그런다. 내가 알기로 귀성군이 절로 돌아다니는 것은 아버지와 독대를 하고 난 뒤였는데, 아버지는 분명 귀성군 뒤에 은밀하게 사람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모가 멀찍이서 귀성군을 보았을 뿐이라고 하니 다행이긴 하지만, 혹여 역으로 귀성군을 뒤따르던 자가 유모나 멀찍이서 너를 발견할 수도 있다. 조심 또 조심하거라.
세종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남긴 유언을 꼭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을 네가 자주 한다고 유모가 서찰 마지막에 적어 놓았더구나. 세종 할아버지의 유언을 필사하여 동봉한다. 세종 할아버지의 시 중에 마지막 구절을 잘 읽어보아라.
다만 우리 님을 위하여 그 몸을 조심하여 주구려.
정말, 이 어미를 위해, 네가 낳은 내 외손자를 위해 그 몸을 조심해 주기 바란다. 내가 이 서찰을 보낸다 하여 네가 회신을 보낼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유모가 나에게 너의 생사를 알려준 것에 대해서는 그의 도리이니, 아는 척하거나 나무라지는 말도록 하여라.
어미가
1 단종의 이름이 이홍위이다.
2 우연히 만난 남녀가 정식 혼례식은 올리지 못하고 부부처럼 살아가는 것을 일컫던 옛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