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화공 안견이 고령군 신숙주에게
1466년 4월 26일
아! 대감, 안평대군의 별장에서 찾아낸 몽유도원도! 이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감, 소인은 예감했습니다. 치지정 비밀의 벽 틈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을 말입니다. 예전부터 안평대군께서 귀중한 것들을 그곳에 은밀하게 넣어두시는 것을 보았기에, 그곳에서 그림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마침내, 그곳에서 몽유도원도를 싼 보자기를 발견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날 우리는 그 그림을 펼쳐놓고 얼마나 감동했습니까. 그림을 찾는 목적은 아예 잊어버리고, 대감과 소인은 그 그림을 감상하느라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린 화공이 미천한 소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대감께서도 감회가 새로우신지 한동안 말없이 그림을 감상하셨고, 그림과 함께 찬시들을 찬찬히 읽어보셨습니다. 치지정 창틈으로 들어오던 햇살이 사라져 더 이상 그림이 어둠에 묻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계셨습니다.
두루마리에는 안평대군이 쓴 두 편의 글을 포함하여 모두 22명, 23편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림과 시문은 2개의 두루마리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 시문은 저마다 친필로 되어 있어 그 누구도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찬시의 순서는 고득종-강석덕-정인지-박연-김종서-이적-최항-신숙주-이개-하연-송처관-김담-박팽년- 윤자운-이예-이현로-서거정-성삼문-김수온-만우-최 씨 순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대감과 소인은 앞으로 이 그림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림을 찾게 되면, 곧장 임금께 갖다 바치지 않고 반드시 대감과 먼저 상의하겠다는, 소인은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임금께 그림과 찬시들을 가져다 바칠 생각이 없다는 서로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미천한 화공이지만, 제 분신과 같은 그림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더 이상 위협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그림이 제 목숨을 위협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대감의 찬시를 주상전하께서 두 눈으로 확인하시면, 소문으로 알던 것과는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대감과 미천한 소인은 일단 주상전하께 그 그림을 가져다 바치지 않기로 무언의 첫 번째 합의를 보았습니다.
대감께서는 그림과 찬시를 찾게 되면, 찬시를 없애버릴 요량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소인이 그림을 없애지 못하는 것처럼, 대감께서도 시를 없애실 수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림도 찬시도 다 살리도록 말입니다. 사실, 주상전하께 거짓을 아뢰고 그림과 찬시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대감께서는 주상전하께서 몽유도원도를 찾으신다는 사실을 정인지 대감께 알렸고, 정인지 대감은 승려 만우에게 알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세 번째 합의를 보았습니다. 일 년 이상 은밀하게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몽유도원도는 없었다고, 소인은 주상전하께, 고령군 대감께서는 정인지 대감께 알려드리기로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합의가 잘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네 번째 합의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림과 찬시를 누가 어떻게 보관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림은 제가 보관하고, 찬시들은 대감께서 집으로 가져가 보관하기로 했다가, 둘 중에 하나라도 발각되면 대감과 소인은 물론 찬시를 붙인 사람들도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대감과 소인은 지금처럼 그림과 찬시들을 일단 이 별장의 비밀 틈새에 그대로 두자는 합의를 했습니다. 허나, 치지정은 이제 대감의 별장이 되었으니, 그림과 찬시들은 대감이 전부 보관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그림에 문제가 생긴다면, 대감께서 어떻게 책임지시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대감과 다시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치지정의 비밀 벽 틈에서 발견된 또 다른 글씨들 말입니다. 똑같은 글씨들이 여러 장 들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누가 어떤 과정에서 썼길래, 안평대군께서 몰래 그곳에 넣어두셨나 더듬어 보았습니다. 안평대군 생전에 복색이 허름한 사람이 찾아와 뵙기를 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최성달이라는 자였는데 말을 더듬고 외모가 부실해 보이는 자였습니다. 마침 안평대군은 평양에 급히 갈 일이 있어 그자의 요청을 거절했으나, 부득부득 떼를 쓰는 바람에 안평대군께서 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멀리서 얼핏 볼 때는 늙은이처럼 보였으나 ,가까이에서 보니 눈빛이 맑은 아주 젊은 남자였습니다. 안평대군께서 이 고집 센 젊은이에게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으셨습니다.
“글씨를 잘 쓰신다기에 한번 뵙고 싶어서 왔을 뿐입니다.”
대감께서는 안평대군의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안평대군께서는 학문과 시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림과 음악도 좋아하셨습니다. 많은 유학자들과 교우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최성달처럼 신분이 미천한 자가 글을 구해도, 기꺼이 붓을 휘둘러 즉석에서 글을 하사하시곤 하셨습니다.
“이 젊은이가 실력을 뽐내고 싶어 하니, 지필묵을 가져 오너라.”
이렇게 해서 최성달이라는 자와 안평대군이 같은 자리에서 붓으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안평대군의 조선 최대 문장가이시고, 아름다운 필체는 견줄 사람이 없습니다. 소인같이 미천한 눈에도 최성달의 글씨는 조잡하고 형편없어 보였습니다. 안평대군은 그의 글씨를 보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더 훈련이 되거든 다시 오너라. 내가 평양으로 갈 길이 멀구나.”
그런데도 최성달은 몸을 움직일 생각은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인 같은 자도 필요할 것이옵니다.”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대감께서는 한 번에 한 장 밖에 쓰지 못하지만, 저는 한 번에 다섯 장 심지어 일곱 장까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무슨 소리냐.”
최성달은 자신이 쓴 글자의 종이를 걷어냈는데, 그 밑에는 똑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소인도 처음 보는 것이라 놀라워 가까이 가서 보았는데, 그 밑의 종이도, 또다시 그 밑의 종이도 똑같이 인출한 듯 같은 것이었습니다. 안평대군은 놀라워하시면서 평양행을 취소하고, 그 자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감, 그런데 그 최성달이라는 자가 그때 썼던 글이 바로 치지정 비밀 벽틈에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안평대군께서도 소인처럼 그때 받은 놀라움이나 신기함으로 해서 보관해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몽유도원도와 최성달의 글을 도로 비밀의 벽 틈에 넣어놓고 집에 와서 생각하니, 불현듯 소용 박 씨의 연서라고 돌아다니는 서찰이 최성달의 소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미천한 소인의 추측일 뿐입니다.
대감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최근 돌아다니는 연서의 필체가 인출한 듯 똑같은 것에 착안해서 그런 글쓰기 능력이 있는 자를 추적하고 있다고 합니다. 범인이 이미 잡혔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나, 그것도 소문일 뿐입니다. 안평대군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귀한 자나 천한 자를 막론하고 은덕을 입었던 자들은 안평대군의 관대함과 풍류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안평대군의 호인 비해(匪海)라는 이름 아래, 안평대군을 따르던 무리들이 모이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몽유도원도도 그렇지만, 최성달의 글도 화근의 소지가 있습니다. 한 번만 더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몽유도원도는 치지정 벽 틈에 그대로 있겠지요?
대감을 뵐 수 있는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화공 안견 배상
작가 주: 신숙주의 찬시1
1 이 찬시는 저자 안휘준, 이병한, 국립중앙박물관의 『몽유도원도』(예경산업사, 1995)의 번역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消息盈虛一理通(소식영허일리통) 소멸하고 생장하며 차고 기우는 것 한경 같은 이치인데,
形神燮化妙難窮(형신섭화묘난궁) 형체와 정신의 변화는 기묘하여 헤아리기 어렵네.
膏?不必論因想(고황불필논인상) 깊은 곳에 담긴 뜻 제멋대로 이야기 할 아니러니,
眞妄須明覺夢同(진망수명각몽동) 참과 거짓 모름지기 꿈과 현실이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萬事擾神常役役(만사요신상역역) 세상 온갖 일들 정신을 어지럽혀 항상 피곤하게 하는데,
只惟睡鄕可歸息(지유수향가귀식) 돌아가 쉴 만한 곳은 오직 꿈나라뿐이로세.
且息若非知所歸(차식약비지소귀) 돌아가 쉴 만한 곳을 알지 못하면
誰能更入桃源谷(수능갱입도원곡) 도원의 골짜기에 뉘라서 다시 들어갈 수 있으리?
烟蘿掩靄擁山根(연라엄애옹산근) 연기자락 아련히 산기슭을 감싸고 있고,
洞口雲霞常吐
時見落花泛流水(시견낙화범유수) 때때로 떨어진 꽃잎 물따라 흘러오는 것 보이지만,
不知何處是桃源(불지하처시도원) 도원이 어드메인지 알 길이 없네.
眞凡?鑿不相宜(진범예착불상의) 진실과 범속은 마치 네모난 자루와 둥근 구멍 같아 어울릴 수 없고,
趨向殊途合有岐(추향수도합유기) 사람의 취향은 또 각기 달라 길이 갈라지기 마련.
誰使天人勤指道(수사천인근지도) 누가 천인으로 하여금 부지런히 도를 가르치도록 하는가?
分明一路走瑤池(분명일로주요지) 요지(瑤池)에 이르는 길은 하나뿐이어늘.
崖傾水轉瓊瑤合(애경수전경요합) 무너져 내릴 듯한 절벽에 물줄기 구비쳐 구슬 같은 방울이 튀고,
地僻山回烟霧發(지벽산회연무발) 깊숙한 곳 산허리 휘도는 곳에 연기 같은 안개 피어나네.
窈窕
垂鞭直琛龍蛇窟(수편직침용사굴) 채찍 드리우고 곧장 요사굴을 찾아든다.
風
羊腸十里飽
?茨土
風掩柴
幽烏數聲人不在(유오수성인불재) 그윽한 숲속에 까마귀소리 들릴 뿐 사람은 없고,
落花芳草使人嗟(낙화방초사인차) 떨어지는 꽃 향기로운 풀잎만이 보는 이를 감탄케 하네.
牆頭閑對數叢竹(장두한대수총죽) 담장 위로 한가로운 대나무 몇 무더기,
尤覺令人俗念絶(우각영인속염절) 사람으로 하여금 문득 속세 생각을 잊게 하네.
自遣此君有奇姿(자견차군유기자) 그대 그 기이한 자태 있는 뒤로,
萬行妖艶無顔色(만행요염무안색) 요염 뽐내는 온갖 것들을 무색케 하네.
??拔地碧琅
落落高標不可攀(낙낙고표불가반) 우뚝 솟아 사람이 올라갈 수 없네.
貞姿閑伎彩雲間(정자한기채운간) 꼿꼿한 자태 한가로이 아롱진 구름 사이로 보이네.
野渡孤舟自幽獨(야도고주자유독) 들판 나룻터에는 외로운 배 절로 호젓하고,
山靑水碧搖寒玉(산청수벽요한옥) 산 푸르고 물 파란 가운데 차가운 구슬 흔들리는 듯,
日夕東風吹軟綠(일석동풍취연록) 해질녘 동풍이 부드러운 잎새를 스치네.
飛流奮勢驚風吹(비류분세경풍취) 나는 듯 흐르는 거센 물줄기에 놀란 듯 바람이 불고,
一帶天紳萬丈垂(일대천신만장수) 파란 하늘에 한 자락 띠처럼 만 길을 드리웠네,
濯纓濯足休相問(탁영탁족휴상문) 갓끈 빨고 발 씻은 일일랑은 묻지도 마시게,
洗盡紅塵世耳歸(세진홍진세이귀) 세속의 티끌 묻은 귀마저 씻고나 가세.
萬樹夭桃錦繡堆(만수요도금수퇴) 만 그루 싱싱한 복숭아나무 비단에 수놓은 듯 펼쳐 있고,
仙風吹送綵霞來(선풍취송채하래) 신선 바람이 멀리서부터 찬란한 안개 불어 보내네,
貌姑近日朝天去(모고근일조천거) 막고(貌姑) 할머니 얼마 전에 하늘 위로 떠나갔고,
留取瓊?寂寞開(유취경파적막개) 구슬 같은 꽃술만이 쓸쓸히 피어 있네.
遠近交加燒曉風(원근교가소효풍) 멀고 가까운 곳에 따사로운 바람 서로 비껴 불며,
高低相暎正重重(고저상영정중중) 높고 낮은 곳이 서로 비추어 첩첩이 겹쳤어라.
仙遊更値三千歲(선유경치삼천세) 신선들 이 곳에서 삼천년을 놀았다니
不是人間一樣紅(불시인간일양홍) 인간 세상 일년에 꽃 한 번 피는 것과는 다르다네.
傾刻看碁已爛柯(경각간기이란가) 잠깐 바둑 한 판 보는 사이에 도끼자루 벌써 문드러졌으니,
眼前千歲不爲多(안전천세불위다) 눈앞의 천년도 많은 것이 아니로세.
報道桃花奈爾何(보도도화내이하) 복숭아꽃 피었다 소식 알려 어쨌다는건가!
世間無處索玄珠(세간무처색현주) 속세에선 검은 구슬 찾을 곳이 없으니,
聞說武陵久零落(문열무릉구영낙) 무릉이 쇠락한 지 오래라고 들었더니,
更隨新夢上新圖(경수신몽상신도) 다시금 새 꿈을 따라 새로운 그림으로 그려졌다네.
人言弱水隔塵區(인언약수격진구) 사람들은 약수(弱水)가 속세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말하지만
我道刀圭不外朮(아도도규불외출) 도규(刀圭)를 딴 곳에서 구할 것 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네.
患坐眞遊渾不識(환좌진유담불식) 참된 경지에 노닐면서 도무지 그 뜻을 모르는 것 걱정이려니와,
市朝何必欠丹丘(시조하필흠단구) 저자거리에 단구(丹丘)없다 탓할 것이 무엇인가?
孰覺惺惺爲彼槁(숙각성성위피고) 저 마른 나무처럼 또렷이 깨어 있는 이는 누구이며,
孰夢
孰主張是必有然(숙주장시필유연) 누가 이것이 반드시 그러하다고 주장하고,
孰能辨之歸太昊(숙능변지귀태호) 누가 이를 가려 저 넓은 하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가?
月殿徒勞誇
叢陰只得慰窮愁(총음지득위궁수) 짙은 숲 그늘은 다만 근심겨운 사람 마음 달래나 줄 뿐.
人間唯有桃源夢(인간유유도원몽) 인간 세상에는 오로지 도화원 찾아든 꿈꾼 것만이,
便是逍遙物外遊(편시소요물외유) 속세 밖에 소요할 수 있는 길이라네.
高人雅尙厭紈綺(고인아상염환기) 지체 높으신 분 인격이 고매하여 무늬 비단을 싫어하고,
至性淸修好澹幽(지성청수호담유) 지극한 성정은 맑고 조용함을 좋아하셨다네,
自多凡骨偏饒分(자다범골편요분) 범속 세상에 사는 몸이 과분한 복을 누려,
得預神仙一夜遊(득예신선일야유) 하룻밤의 신선놀이에 함께 끼일 수가 있었다네.
雙
還丹無術兩毛新(환단무술양모신) 환단(還丹))으로도 양쪽머리 새로 검게 할 수는 없다네.
三年一葉將安用(삼년일엽장안용) 삼년에 한 잎 얻어 장차 어디에 쓰랴?
洞裏桃花笑殺殺人(동리도화소쇄인) 동굴 안의 복숭아꽃이 사람을 비웃는데-.
高陽 申叔舟 고양 신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