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성균관 정앙이 고령군 신숙주에게
1466년 4월 24일
고령군 대감.
그동안 강녕하신지요? 집현전이 폐지된 이후로, 대감을 뵈옵는 일이 점점 드물어졌습니다. 고매한 학사들을 가까이 모실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가슴 아플 따름입니다. 대감, 대감께서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웠습니다. 대감의 용기와 결단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영의정 자리를 마다하는 학사시니, 성균관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자로써 어찌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감, 대감께서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시는 상황에서 소인은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감히 이렇게 서찰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선, 선왕이 승하하시면 3개월 후 지내는 제사 졸곡을 마지막으로 실록청을 만들고, 새로 즉위한 왕은 영의정을 책임자로 임명하여 선왕의 실록편찬에 착수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지만 현왕 즉위 십년이 지나서야 겨우 실록청이 입질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선왕시절의 각종 기록을 모으고 있으나 다들 몸을 사리고 내놓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는 춘추관에서 그날그날 직접 본 사건을 기록한 입시사초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관들이 집에 돌아가서 자신의 의견까지 넣어 기록하는 가정사초는 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반강제로 걷은 것이 빈 종이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소인이 궁금한 것은 사관이나 대신들의 몸사림이 아닙니다. 괴이하게도 선왕 대에서 ‘왕’이라는 이름을 아예 없애버리고 ‘노산군’으로 기록을 남긴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이 진실이라면, 이는 어린 왕이 국정을 이끌었던 약 3년이라는 세월 동안 조선에는 아예 왕이 없었다는 논리가 됩니다. 물론 선왕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으니, 그대로 기록하면 그만입니다. 노산군으로 강등당한 것이 역모를 꾀했다는 것인데, 그런 이유라면 역적의 실록을 남겨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런 논리라면, 승하하시고 계시지 않으니, 아예 ‘죽은 자의 기록’이라고 남기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대감께서 영의정으로 지내셨으니, 이 일을 모른다하시지 않으시겠지요.
선왕의 실록에 대해 차마 입을 열지 못했으나. 대감께, 과거 존경했던 학사께 감히 진실을 알기를 청하는 것이옵니다. 게다가 실록청이 아니라 일기청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실록은 왕을 위한 기록이니, 노산군을 위해서는 매일 매일의 기록을 담은 일기청을 만들었다지요. 말 그대로, 일기라 해도 당연히 선왕의 즉위부터 양위1한 때까지 왕으로서의 기록을 남겨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왕이 노산군으로 강등된 것은 선위가 이루어지고 난 후의 일일진데, 왕의 행적을 실록으로 기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역사가 제대로 기록될 수 있겠습니까.
‘태조’, ‘태종’, ‘정종’, ‘세종’, ‘문종’이라는 묘호는 왕이 승하하신 즉시 붙여졌으나, 어린 선왕은 아직 묘호조차 없으니 이 일을 어찌 합니까. 어린 왕에 대한 연민이나 현왕에 대한 불만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노산군의 일기를 편찬할 자들의 이름까지 비밀에 붙여져 있지 않습니까. 물론 사초를 기록하는 작업은 가능한 그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편찬자까지 알 수 없다면, 그 사초의 진실여부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현왕의 치하에서 어린 선왕의 업적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들고 나올 신하가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 편찬자가 되기를 기피하고, 집에서 쓴 가정사초를 내라고 해도 그날그날의 날씨나 적은 기록만 내놓는다니 참으로 일기(日記)가 아니라 일기(日氣)가 아니겠습니까. 항간에는 대감께서 이런 과정에 염증을 느껴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소인은 과거 존경했던 집현전 학사께서 우리 조선의 역사를 위해 진실을 간구할 따름입니다.
두 번째, 대감께서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시는 상황에서 혹여 집현전을 다시 복원하실 계획이 없으신지요. 우리 성균관은 유생들을 이끌어 주실 집현전이 다시 복원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집현전은 세종임금 시절에 학자 양성과 학문 연구를 위한 기관으로 집현전관은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과거시험의 시험관으로도 참여하고, 무엇보다도 사관(史官)의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집현전이 있어 학사들이 사관의 일을 맡았다면, 지금 같은 황당한 상황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 37년간이나 건재해 왔던 집현전이 현왕에 와서 폐지되었습니다. 이는 노산군 복위 시도과정에 박팽년 성삼문 등 사육신을 비롯한 반대파 인사가 집현전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집현전의 폐지는 단순히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이나 집현전 학자가 누릴 수 있는 특전을 빼앗긴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집현전은 왕에게 경서나 사서를 강론하는 자리로 국왕이 유교적 교양을 쌓도록 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돕는 기관이었습니다. 이를 하지 않으니 조선의 근간인 유교가 흔들리고 그 틈새로 불교가 틈입하여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릴 지경에 놓였습니다. 더구나 집현전에서 공부하는 학사들에게 주어졌던 서책의 우선권이 사라지니, 과거처럼 서책 전집을(典籍)을 구입하거나 인출하기도 어렵고, 마음껏 서책을 연구할 수도 없습니다. 집현전이 폐지되면서 서책들이 예문관 등 다른 곳으로 옮겨지다 보니, 유교 서책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이가 없어 관리가 소홀하고 없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종임금과 유학자들이 창제한 신문자가 불교서책인 월인석보의 앞잡이처럼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과거 집현전은 연구기관의 역할 이외에도 바람직한 정치의 역할도 하지 않았습니까. 세종 임금 말년, 세자의 섭정 시에는 집현전관이 동시에 서연관을 맡기도 했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은 최근 수미대사의 동생인 김수경이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능력 있는 유학자들은 벼슬에서 물러나고 절에서 떠돌던 중들이 벼슬 감투를 쓰고 앉으니, 앞으로 이 나라 꼴이 어떻게 되어가겠습니까. 존경하는 대감,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집현전을 복원하여, 이 미련한 유학사들이 제대로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고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뵙게 될 때가지 강녕하시기 바랍니다.
정앙 배상
1 임금의 자리를 물려줌, 선위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