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백일장(百一張)이 백이장(百二張)에게
1466년 4월 19일
5월 마지막 날에 열릴 백팔장 대표 모임에 백이장만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은 것으로 안다. 나는 백이장도 당연히 동의할 줄 알고 참가 의사를 표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다른 짝패들은 둘씩 같이 모임에 참석하겠지만, 백이장이 오지 않으면 나는 혼자 참석하게 된다. 모임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혹여 연락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여, 다시 한 번 급하게 이 서찰을 보내니, 보낸 인편으로 바로 나에게 답장을 주기 바란다.
군왕의 현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제 백장과 그 짝패 백칠장을 만났는데, 두 승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가, 수수께끼 같은 말을 시작했다. 백장이 “이제 임금께서는 치러야 할 모든 업보를 다 치른 셈인가?”하고 묻자, 백칠장이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나?”하고 무심히 대답했다. 그러자 다시 백장이 “의경세자가 죽었고 그리고 아지 왕자군이 죽었다. 두 왕자가 죽었으니 그 업보가 끝이 난 셈이 아니겠느냐?” 라고 다시 물었다. 백장의 말을 듣고 백칠장이 고개를 들더니 다시 대답했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나?”
백이장, 나는 그들의 수수께끼 놀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백장이 다시 말했다. “의경세자가 죽고 나서 주상전하는 나머지 한 아들을 잃게 될 것을 노심초사하셨을 것이다. 꼭 왕자 둘을 잃어야 한다면 지금 세자로 계신 해양대군을 절대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셨을 것이고”라고 하자, 백칠장이 다시 “그래서 또 다른 업보가 생겼네”라고 말했다. 그들 짝패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이야기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가 무슨 말이냐고 자꾸 묻자, 그들은 우리 짝패가 알고 있는 것을 내놓으면 자기들 것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나는 어차피 이번 백팔장 대표모임이 이루어지면 다 나올 이야기다 싶어, 나도 알고 있는 비밀을 말할 테니 지금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했다.
“두 왕자를 잃어야 업보가 끝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백장과 백칠장은 “백성들의 소문 속에 그 해답이 있는 것 같다”고만 대답했고, 더 이상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그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왕이 저지른 업보 때문에 두 왕자가 죽게 되어 있었는데, 의경세자는 그렇다 치고 해양대군 대신에 왕자군 아지가 죽었다는 것이다. 왕자군 아지는 소용 박 씨의 소생이 아닌가. 백장과 백칠장 짝패가 알고 있는 비밀은 딱 여기까지라 했다. 백성들의 소문은 왕과 형제간에 어느 한 쪽이 죽으면 그 반대쪽이 인과응보 식으로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그 비밀의 대가로 우리 짝패가 알고 있는 비밀을 내놓았다. 어차피 승려 백팔장의 공개서찰로 인해 이런 비밀들은 자연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밀은 큰 것도 아니고, 알려주어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미 세종 임금시절에 번역해서 출간한 훈민정음 언해본 원본에는,
로 시작되는 세종대왕의 어지 서문이 110자 이상이었다. 우리는 그 원본 대체 작업을 하였다. 지금 원본이 없어져 가고 있다고들 난리지만, 지금 원본이라고 하는 것은 진짜 원본이 아니다. 세종 어지 서문을 108자로 줄이는 작업을 처음에는 궐 안의 정음청에서 할 계획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여장사 암자로 옮긴 것이었다. 당시 우리는 그 작업을 큰 비밀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어지 서문의 글자수를 불교의 신성수로 바꾸기 위해, 없어도 괜찮은 글자를 두세 자 줄이는 정도로 여겼다. 불심이 지극하신 왕의 정성이라 여겼을 뿐이다. 진짜 원본인 세종임금의 어지 서문은 여장사 암자에서 108글자로 대체된 후, 모두 파기되어진 것으로 안다.
우리는 훈민정음 어지 서문을 108글자로 만들기 위해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다. 본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붓글씨로 책 내용을 쓴 다음 이것을 목판에 뒤집어 붙인 후 그 글자대로 목판에 새겨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당시 번각을 사용했다. 즉, 책 내용을 쓰지 않고 이미 세종시절 만들어진 언해본 원본 어제 서문을 목판에 뒤집어 붙여 그대로 새기는 방식을 사용했다. 책 내용을 새로 쓰지 않아도 되는 장점 때문에 시간과 노동력이 절약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원래의 책과 똑같은 형태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몇 자 줄여 108자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원본이라고 하는 것, 즉 어지 서문에 108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원본이 아니라 원본을 대체한 것이다. 진짜 원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훈민정음 언해본 108자를 완성했을 즈음 문종 임금이 승하하셨고, 어린 왕이 즉위했다. 현왕은 신성수인 108자 완성 작업을 했으나, 왕권을 쥔 뒤부터는 이미 교만해져 그 새문자를 부처에게 바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백성이나 유학자들의 원성을 살 수 있었기에 망설였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마치 약속을 어긴 벌처럼 갑자기 의경세자가 명을 달리했다. 군왕은 아차 했을 것이다. 약속을 어긴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백성의 소리를 부처에 바친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108자의 훈민정음 어지 서문을 넣어 『월인석보』를 완성하여 백성들에게 배부한 것이다.
백이장, 『월인석보』의 첫 페이지를 보면 ‘세종어제 훈민정음1’이라는 글귀로 시작하고 있다. ‘세종’이라는 묘효는 살아있을 때는 쓸 수 없는 것이니, 이렇게 ‘세종’이라는 묘효가 든 것은, 승하하신 부왕의 신문자 창제업적을 높이기 위해 아드님이신 현왕이 개작한 것처럼 여기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첫머리에 보란 듯이 ‘세종어제 훈민정음’이라는 제목을 달고 앞 4줄을 글자체가 다르게 넣어놓았다. 그렇지 않다면 얼마든지 같은 글자체로 통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 안에 들어 있는 훈민정음 언해 어제 서문을 본래 것인 냥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월인석보』와 우리가 대체한 원본, 양쪽이 모두 108자로 통일되어 있으니, 사람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원본의 원본을 숨기고, 새 문자를 부처에게 바치기 위한 비밀작업이었다.
『월인석보』 1권의 첫 부분에 들어있는 훈민정음 언해본 첫 페이지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현왕의 학식과 경험덕분이기도 했다. 과거 세종임금은 부왕 태종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자소를 설치하여 활자를 주조한 것을 대단한 업적으로 여기시면서, 서적들을 인출할 수 있도록 글자를 주조하는 책임을 집현전 학사들에게 주었다. 이때 활자의 기본은 경연2에 소장된 서책들을 열람하여 삼도록 하였고, 이러한 서책에서도 찾을 수 없는 글자체는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직접 쓰게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필요한 글자체가 있으면 수양대군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 있었다. 훈민정음 언해 어지 서문의 글자 몇 개를 없애거나, 월인석보 첫 페이지에 몇 줄을 수정하는 것은 현왕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백이장, 우리 짝패가 알고 있는 비밀을 백장과 백칠장도 알게 되었고, 우리도 그들의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제 점점 다른 비밀들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니 서로 고리를 엮어 가면, 백팔장의 본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혹여 백이장이 이번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연유가 있으면 알려 달라. 혹여 몸이 아프신 것은 아닌지도 알려 달라. 혹여 혼자만 알고 마음 고생하는 비밀이 있으면 그것도 알려 달라. 적어도 짝패인 나에게는 모든 것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일어날 많은 변화에 대해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백일장 씀
1 세종 어지는 로 시작하는 것으로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를 밝힌 서문이고, 세종어제는 세종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2 왕과 유교경전을 강론하는 일을 주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