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승려 덕중이 백팔장에게
1466년 2월 28일
백팔장, 승려 덕중은 여인 덕중의 죽음으로 마음이 쓸쓸합니다. 궐에 들어가 왕의 후궁이 되기 이전,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외롭게 꽃과 나무와 짐승을 벗 삼던 순진한 한 여인을 기억하고 있어 그러한가 봅니다.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이유 역시, 그 여인과 제 이름이 같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덕중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제가 죽었다는 말로 들려 소스라칠 때가 있었습니다. 제 본명은 잊은 지 오래고, 백팔장이 주신(다들 수양대군이 준 것이라고 알지만) 덕중이라는 법명으로 살아온 세월입니다. 백팔장을 뵌 적도 없고, 이렇게 서찰을 써도 개인적인 회신을 받을 기대조차 못하지만, 항상 존경하는 마음이며 언젠가는 뵐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목에 칼을 차고 개처럼 끌려갈 때의 그 치욕감이야 꿈엔들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연이었을까요. 하필 그때 수양대군께서 길을 지나가셨습니다. 물론 길을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제 목을 조르고 있던 칼을 풀어주라 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저를 사저로 불러들여 피가 흐르는 목을 치료해주셨고, 따뜻한 차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분과 운명을 같이 하리라 맹세했습니다. 불가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 인연의 무서움이 실감나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이름을 지닌 여인 덕중과 함께 보낸 시간이 적지 않으니, 그 여인과 나의 인연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신기(왕위)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수양대군에게 전하라고 백팔장이 저에게 주신 첫 번째 전언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미 수양대군에게 연결된 운명의 끈을 느꼈습니다. 그 분은 무슨 소리냐며 벌컥 화를 내시면서, 그런 말을 할 것이면 다시는 집에 걸음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소신은 때가 되면 아시게 되실 것이라 전했습니다. 수양대군은 칼을 쓰고 걷던 미천한 승려가 목숨을 걸고 전하는 전언의 무게를 알고 계셨습니다.
백성을 위해 만든 소리를 부처에게 바치면 신기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
백팔장께서 주신 두 번째 전언이었습니다. 말을 전하기는 했으나, 당시 백성을 위해 만든 소리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기 않았기에, 소인도 수양대군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처음에 소인은 그것이 원각사종1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수양대군도 저와 같은 생각이셨는지, 이미 원각사에 바쳐졌으니, 부처에게 바친 것이나 다름없다 답하셨습니다. 수양대군은 문종 임금이 승하하실 때까지, 백성을 위한 바른 소리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신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번에는 수양대군이 저에게 전언을 주셨습니다.
백성을 위한 소리가 무엇이냐고 물어오너라.
그제야 백팔장께서는 그것이 훈민정음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저도 놀랐지만 수양대군도 수긍하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 훈민정음은 부왕인 세종께서 만드셨고, 백성을 위한 글이기에, 자신이 마음대로 부처에게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하셨습니다. 부왕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지어 선조들의 공적과 왕권의 위엄을 세운 글이며, 유교 경서들을 번역하는 선비들을 위한 글이며, 『삼강행실도』 등 열녀전을 번역하는 부녀자들을 위한 글이라고도 했습니다. 더구나 이 문자는 집현전 학사들의 절대적인 협조 아래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부처를 위해 바치라는 요구는 실현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 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눈치 채게 일을 진행할 필요가 없다.
백팔장의 다른 전언은 그렇게 전해졌습니다. 저는 그렇게 백팔장과 수양대군 사이의 전령 노릇을 했습니다. 최근 백팔의 소용돌이가 궐 안팎에서 몰아치고 있는 몇 달 동안, 저는 아무런 전언도 받지 못했습니다. 주상전하께서 백팔장께 보내는 전언도, 반대로 백팔장께서 주상전하께 보내는 전언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여태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느꼈던 승려 만우가 서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아, 이전에 안평대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있었겠지요. 제가 주상전하와 가까운 관계이니,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신 결과라 여기고 있겠습니다. 한 가지, 주상전하께서 몽유도원도를 찾고 계신다고 하니, 혹여 주상전하께서도 백팔장과 안평대군과의 관계를 모르고 계셨던 것은 아닌지요?
왕좌를 차지하고 임금이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 있어야 가능하겠지요. 인간적인 욕심이나 단순한 욕망만으로, 어찌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 만물을 지키고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수양대군께서 즉위하신 것은 크신 하늘의 뜻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허락하신다면, 한번 뵙기를 소망합니다.
승려 덕중 배상
1 지금의 보신각종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