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백장(百張)이 백칠장(百七張)에게
나는 백 번째 승려 백장이다.
백팔장(百八張)이 띄운 단체 서찰을 백칠장도 받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백팔장(百八張)이 띄운 서찰을 보니 사태가 심각하다.
궐내에 어떤 변화가 일고 있는 듯하다. 변방에서 돌아온 양산군 양정이 처형되었다. 계유년 10월 10일, 양정의 철퇴가 바로 우리 거사의 시작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임금께서 그의 목을 치셨으니, 명분이 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수양대군이 왕좌에 오른 것은 많은 사람들의 뜻과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임금은 그동안 그 사람들에게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계유정난 이후의 정난공신, 왕으로 책봉된 뒤의 좌익공신, 그들을 공신으로 책봉하고 벼슬과 땅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죄를 지어도 영원히 용서한다”라는 무죄선언까지 하사하셨다. 살인죄 혹은 강간죄를 지어도 벌하지 않으셨고, 어쩔 수 없이 벌을 주어야 할 경우에도 옥에 가두는 척했을 뿐이다. 그런데 임금께서 양정의 취언에 죽음을 내리셨다.
담이 서늘한 이유는 임금께서 공신중의 공신인 양정의 목을 베셨다는 사실이다. 물론 양정이 왕을 능멸한 말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동안 술에 취해 왕에게 ‘너’라고 했던 정인지도 무사했고, 왕을 꼬집었던 신숙주도 무사했다. 공신들에게 절대적으로 관대하셨기에, 최근에는 그런 비호를 믿고 공신들이 날뛰기까지 했다. 임금께서 첫 번째 공신의 목을 베어 공중에 높이 매달았다! 공신은 임금을 세운 기둥이자 임금을 보호하는 담이 아닌가. 그들을 베어버리거나 무너뜨리면 손상되는 것은 바로 임금이다. 임금의 심경에 일어나고 있는 이런 변화가 앞으로 우리 백팔장에 미치게 될지도 모른다.
백칠장,
어제 덕중이 나를 찾아왔다. 만우가 덕중에게 안평대군에 대한 일을 비교적 상세하게 털어놓은 모양이다.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그는 수양대군의 은공으로 불교계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한때 안평대군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이야기에 배신감마저 느끼는 눈치였다. 나는 물론 그 내막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백팔장의 그 누구도 모든 것을 통째로 알고 있지는 못한다. 비밀을 지키기 위한 방책이다.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려주긴 하지만, 나머지 알려주지 않는 부분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행하도록 되어 있다. 승려 만우가 알고 있는 것도 한 조각밖에 안된다. 승려 덕중이 알고 있는 것도 한 조각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자네나 내가 알고 있는 것도 한 조각에 불과하다. 백여덟 조각의 헝겊으로 기운 승려들의 가사! 이것이 바로 백팔장의 원리이다. 백팔장 회원들이 알고 있는 조각들을 모두 붙여야 그림 하나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안평대군에게 신탁이 내려졌다고 믿게끔 하는 것은 만우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백칠장, 자네도 알겠지만 만우가 믿고 있는 것처럼 정말 우리가 안평대군을 세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안평대군의 꿈이나 그림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이다. 안평대군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정월 초하루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하고, 왕이 나올 땅이라 하여 무계정사를 짓게끔 한 것은 미끼였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안평대군이 왕이 되도록 만든 과정이 아니라 도리어 수양대군이 왕이 되도록 만드는 과정이었다. 수양대군이 무엇을 빌미로 조카의 왕위 자리를 빼앗을 수 있었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칼을 들이대고 비키라고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특히 왕의 자리는 명분이 중요하지. 그래서 안평대군이 어린 왕의 자리를 노린다는 것을 핑계 삼을 수 있도록, 수양대군이 명분을 가지고 거사를 치를 수 있도록, 앞서 준비를 한 것뿐이다. 만우는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지. 물론 그는 아직도 우리가 안평대군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고 믿고 있다. 그는 그렇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이상을 알면 자신이 이용되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고, 불행해 질 것이다. 아니 그렇게 떠도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미 불행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백칠장, 그런데 백팔장의 서찰내용 중, 밀약서의 비밀을 엄중히 지키라는 당부를 보았을 것이다. 밀약서는 지금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비밀로 유지되기를 원한다면, 당사자에게만 당부하면 될 일 아닌가. 이렇게 모두에게 서찰로 당부하면, 없던 관심도 생기고 도리어 폭로되기 쉬운 것이 아니겠는가.
백장(百張)이 백칠장(百七張)에게
1466년 2월 20일
나는 백 번째 승려 백장이다.
백팔장(百八張)이 띄운 단체 서찰을 백칠장도 받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백팔장(百八張)이 띄운 서찰을 보니 사태가 심각하다.
궐내에 어떤 변화가 일고 있는 듯하다. 변방에서 돌아온 양산군 양정이 처형되었다. 계유년 10월 10일, 양정의 철퇴가 바로 우리 거사의 시작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임금께서 그의 목을 치셨으니, 명분이 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수양대군이 왕좌에 오른 것은 많은 사람들의 뜻과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임금은 그동안 그 사람들에게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계유정난 이후의 정난공신, 왕으로 책봉된 뒤의 좌익공신, 그들을 공신으로 책봉하고 벼슬과 땅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죄를 지어도 영원히 용서한다”라는 무죄선언까지 하사하셨다. 살인죄 혹은 강간죄를 지어도 벌하지 않으셨고, 어쩔 수 없이 벌을 주어야 할 경우에도 옥에 가두는 척했을 뿐이다. 그런데 임금께서 양정의 취언에 죽음을 내리셨다.
담이 서늘한 이유는 임금께서 공신중의 공신인 양정의 목을 베셨다는 사실이다. 물론 양정이 왕을 능멸한 말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동안 술에 취해 왕에게 ‘너’라고 했던 정인지도 무사했고, 왕을 꼬집었던 신숙주도 무사했다. 공신들에게 절대적으로 관대하셨기에, 최근에는 그런 비호를 믿고 공신들이 날뛰기까지 했다. 임금께서 첫 번째 공신의 목을 베어 공중에 높이 매달았다! 공신은 임금을 세운 기둥이자 임금을 보호하는 담이 아닌가. 그들을 베어버리거나 무너뜨리면 손상되는 것은 바로 임금이다. 임금의 심경에 일어나고 있는 이런 변화가 앞으로 우리 백팔장에 미치게 될지도 모른다.
백칠장,
어제 덕중이 나를 찾아왔다. 만우가 덕중에게 안평대군에 대한 일을 비교적 상세하게 털어놓은 모양이다.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그는 수양대군의 은공으로 불교계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한때 안평대군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이야기에 배신감마저 느끼는 눈치였다. 나는 물론 그 내막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백팔장의 그 누구도 모든 것을 통째로 알고 있지는 못한다. 비밀을 지키기 위한 방책이다.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려주긴 하지만, 나머지 알려주지 않는 부분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행하도록 되어 있다. 승려 만우가 알고 있는 것도 한 조각밖에 안된다. 승려 덕중이 알고 있는 것도 한 조각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자네나 내가 알고 있는 것도 한 조각에 불과하다. 백여덟 조각의 헝겊으로 기운 승려들의 가사! 이것이 바로 백팔장의 원리이다. 백팔장 회원들이 알고 있는 조각들을 모두 붙여야 그림 하나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안평대군에게 신탁이 내려졌다고 믿게끔 하는 것은 만우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백칠장, 자네도 알겠지만 만우가 믿고 있는 것처럼 정말 우리가 안평대군을 세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안평대군의 꿈이나 그림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이다. 안평대군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정월 초하루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하고, 왕이 나올 땅이라 하여 무계정사를 짓게끔 한 것은 미끼였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안평대군이 왕이 되도록 만든 과정이 아니라 도리어 수양대군이 왕이 되도록 만드는 과정이었다. 수양대군이 무엇을 빌미로 조카의 왕위 자리를 빼앗을 수 있었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칼을 들이대고 비키라고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특히 왕의 자리는 명분이 중요하지. 그래서 안평대군이 어린 왕의 자리를 노린다는 것을 핑계 삼을 수 있도록, 수양대군이 명분을 가지고 거사를 치를 수 있도록, 앞서 준비를 한 것뿐이다. 만우는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지. 물론 그는 아직도 우리가 안평대군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고 믿고 있다. 그는 그렇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이상을 알면 자신이 이용되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고, 불행해 질 것이다. 아니 그렇게 떠도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미 불행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백칠장, 그런데 백팔장의 서찰내용 중, 밀약서의 비밀을 엄중히 지키라는 당부를 보았을 것이다. 밀약서는 지금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비밀로 유지되기를 원한다면, 당사자에게만 당부하면 될 일 아닌가. 이렇게 모두에게 서찰로 당부하면, 없던 관심도 생기고 도리어 폭로되기 쉬운 것이 아니겠는가.
백장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