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봉원 부원군 한명회가 상당 부원군 정인지에게
봉원 부원군 한명회가 상당 부원군 정인지에게
1446년 2월 15일
상당 부원군 대감, 이렇게 좋은 날이 이렇게 슬프고 불안한 날이 될 수도 있는가. 이 나라 종묘와 사직을 이을 왕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주상전하께서 특별히 베푼 술자리가 아니었던가. 내 딸은 열여섯 나이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이듬해 첫아들을 낳았지만 세상을 떠났고, 세자의 후궁이었던 우의정 한백람의 딸, 소훈 한 씨가 왕손을 생산하셨으니, 나로서는 참으로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네. 킁, 그러나 그보다도…
오늘은 참으로 안타까운 날이 아닌가. 언젠가 있었던 술좌석에서 상당 부원군 대감의 취기 때문에 혼비백산한 일이 있어서인지, 오늘 술자리에서는 소름끼칠 만큼 종친이나 대신들이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술을 마셨지 않았나. 술자리에서만은 격의 없이 대화를 주고받던 군신의 관계였고, 더구나 왕손이 탄생하신 다시없을 기쁨을 나누는 자리였는데, 다들 심하게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네. 손자를 본 주상전하는 피폐한 심정을 내려놓고 술을 마시셨고, 용안에 화색이 도시니 신하들도 마음이 놓였네. 안도하는 마음에 술기운이 보태져 조금씩 분위기가 풀어지는 듯도 싶었네.
킁, 그 분위기 속에서도 위태위태한 것은 바로 양산군 양정이었네. 그는 시작부터 끝까지 술만 마셨는데, 본래 술을 좋아하는 위인이긴 하나 변방에서 돌아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마신 술이 연회에까지 계속 연결된 듯 했네. 아시다시피 양정은 이 몸이 수양대군에게 소개한 인물로 무식하지만, 그 뭐랄까 신의라는 것이 있는 사람이었네. 킁, 너무 오랜 세월 변방에 방치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사람들은 자신의 공을 알아주지 않으면 서둘러 마음이 떠나버리기 때문이네. 연거푸 마시는 술잔에서 그의 분노가 느껴졌다네. 주상전하께서도 그것을 느끼셨는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다독이듯 두어 번 두드리시고, 그의 큰 잔에 가득 술을 부어 주셨네. 하지만 이미 만취한 양정은 왕이 내리신 술잔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네.
주상전하는 머쓱해진 듯 곁에 앉아 있는 관상감과 누군가에게 무슨 책에 대해 하문하시는 듯 했지. 술자리에서 일부러 학문을 꺼내셔서 불편한 분위기를 풀려고 하셨는데, 웬일인지 질문을 받는 그들이 입을 벙긋하려 들지 않았네. 킁, 참으로 기가 막히는 침묵이었지. 아무리 술이 취했다 해도, 아니 오히려 술이 취한 것 같지도 않은 두 사람은 어쩐 일로 묵묵부답이었네. 나는 그들이 대답을 몰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줄 알았고, 모르면 모른다고 대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네. 오리무중으로 그들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네. 주상전하는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었던 듯 소리를 지르셨네.
“감히 왕이 묻는 말에 침묵으로 저항하다니, 여봐라. 저들을 옥에 가두어라.”
헌데, 그때 술에 취한 양정이 앞으로 나오더니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네.
“전하는 무엇 때문에 이처럼 수고롭게 그러십니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너무 놀라 숨을 멈추었네. 킁, 그제야 변방에 그를 그대로 두어야했다는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지. 내가 그를 한양으로 끌어올리지 않았나. 하지만 너무 늦고 말았네. 양정의 갑작스런 질문에 주상전하께서는 대답하셨지.
“과인은 나라의 왕이다. 이 모든 일을 총괄하는 것이 어찌 본분이 아니겠느냐.”
“전하가 즉위하시고 세월도 흘렀으니, 이제 편안하고 한가하신 시간을 가지심이 합당합니다.”
“내가 한가하게 지내면 나라일은 누가 한단 말인가?”
“일을 할 누군가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양산군은 내가 임금의 자리에 연연해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어서 승지를 시켜 옥새를 가져오게 하라.”
양정의 무엄함도 도를 넘었지만, 주상전하는 또 이 무슨 말씀이신가. 다른 때 같으면 술 때문이라며 도리어 신하를 다독이시던 주상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가슴이 철렁했네. 어찌 보면 대신들이나 백성들의 잇따른 공격에, 마음을 많이 다치신 것이네. 상서원에 가서 옥새를 가져오라 득달같이 호령하셨지만, 누가 그 명을 받을 것인가. 옥새를 가져오라 독촉을 하실 때마다, 그저 죽여 달라고 고개를 조아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네. 그런데 양정은 사태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주상전하의 코앞에 앉아 여전히 큰소리를 쳤네.
“어느 명이시라고 승지들은 옥새를 가져오지 않는가?”
킁, 악몽을 꾸는 기분이랄까? 내가 판 함정에 내가 걸려 든 기분이었다네. 양정이 누군가. 바로 김종서의 머리를 철퇴로 내리치고, 수양대군을 왕위에 세운 무사가 아닌가.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만함이 무식하게 큰 덩치를 통해 배여 나오고 있었으니 위협적일 수밖에. 그의 몸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네. 주상전하께서 철퇴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지 않으셨겠는가. 처음부터 긴장 속에서 시작된 연회는, 킁, 흥이 오르기도 전에 끝이 나고 말았네. 옥새를 가지러 간 승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들은 술상 앞에서 벌을 서고 있었네. 이 일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네. 만나서 상의 좀 하세나.
한명회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