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상선 김처선이 환관 방비리에게
상선 김처선이 환관 방비리에게
1465년 12월 28일
친잠례와 봄 양잠의 결산에서 발견했다는 이상한 점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네가 귀띔한 대로 정말 궐내 누군가가 누에를 빼돌렸는지 말이다. 너는 상선 전균이 개입된 것 같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전 상선 위치에서 궐내 물건을 빼돌리고자 마음먹는다면, 값비싼 물품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아예 돈을 쉽게 수중에 넣을 수도 있다. 누에를 빼돌려 어디에 썼겠으며, 돈이 된들 얼마나 되었겠느냐. 너는 네 친구인 상차 강원종까지 의심하고 있는데, 상차 역시 빼돌리려면 비싼 차를 빼돌렸을 것이다. 누에는 보관도 어렵고, 잠실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도 싶지 않으며, 훔친 누에들을 궐 밖으로 가지고 나가기 위해서는 궐을 최대한 가로질러야 하므로, 누에는 훔칠 수 있는 물건 중 최악이다. 누에가 분실된 것 같다는 생각에 수긍은 가지만, 네 추리에는 무리가 있다. 그 건은 당분간 덮어두도록 하자.
네가 상차 강원종을 통해 구해 보겠다던 『훈민정음 언해』 원본을 손에 넣었다. 전 상선이 『훈민정음 언해』 원본과 『월인석보』 1권을 비교해서 한번 보라며 아랫것을 시켜서 보내왔다. 전 상선의 말대로, 『훈민정음 언해』 원본과 『월인석보』 1권에 실린 내용을 눈여겨보았지만, 첫 네 줄이 다른 것을 빼고는 별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비리야, 책을 주르르 넘겨보다가 『월인석보』 1권의 마지막 면을 우연히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그 끝부분에 ‘摠一百八張(총일백팔장)’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마치 숨겨놓은 글자처럼 조그맣게 말이다. 이렇게 면수나 장수를 표시하는 서책은 처음 보는데다가, 요즘 한창 시끄러운 ‘백팔’ 글자 타령하고 연관이 있는가 하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학사도 아니고 서책을 연구할 입장도 못되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월인석보』 1권 마지막 면을 자세히 보거라. 맨 끝부분에 개미만 하게 붙어 있으니,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할 것이다.
<『월인석보』 1권의 마지막 페이지 끝부분에 있는 ‘총일백팔장’이라는 기록>
네게 보내는 이 서책은 사실 네 친구 상차가 전 상선에게 보낸 것이고, 이것을 다시 전 상선이 나에게 보낸 것인데, 너에게 보낼 것이니 한번 살펴보거라. 상차 강원종은 과거 정음청에서 일했으니, 『월인석보』 1권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들은 바가 없는지 넌지시 알아 보거라. 단순히 소용 박 씨와 관련하여 호기심 때문에 물어보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 상차는 전 상선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지나친 관심을 보이지 말거라. 정말 누에를 손댄 것이 상차 강원종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은근슬쩍 그런 의심을 내비치면서, 그쪽에서 화를 낼 때 슬쩍 대화를 바꾸기 위해 묻는 것처럼 하여라. 그러면 누에와 『훈민정음 언해』 이 두 가지에 대한 상차 강원종의 반응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비리야. 네가 경복궁으로 들어와 내 곁에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특히 친잠례 이후, 네가 원유에서 뽕나무 열매나 뽕잎 그리고 심지어 누에똥까지 효과적인 사용법을 개발하고 있다니 고맙고 자랑스럽다. 그 일로 잠녀들에게도 계속 일거리가 주어지니 중전마마께서 기뻐하시는 것 같고, 친잠례를 위해 너를 경복궁에 불러들이자고 말씀드렸던 일로 중전마마께서 나까지 흡족하게 여기시는 것 같다. 중전마마는 옛날 잠저에 계실 때부터 뒤뜰이나 정원에서 유용한 무엇을 가꾸거나 수확하는 것을 귀히 여기시고 즐겨 보셨다고 들었다. 소용 박 씨를 아끼셨던 이유도 그런 것 때문이라고들 하지 않더냐. 중전마마께서 좋게 여기시니, 최근 주상전하께서 나를 보는 눈빛도 부드러워지셨다. 다 네 덕이다.
소용 박 씨 연서사건에 말려들어 목숨을 잃은 환관 김중호와 최호의 아내들 생계를 돕기 위한 방책이 섰다. 얼마 전 궐내에서 연회 음식을 담당하던 대령숙수가 완전히 출궁하였다. 궐 밖에 나가면 어떻게 생계를 이어갈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고급 음식점을 차릴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주상전하나 종친의 연회를 위해 음식을 만들던 최고급 요리사다. 비록 늙긴 했으나, 그 뛰어난 음식 솜씨라면 어디에서나 생계를 꾸려가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대령숙수가 음식점을 차리도록 돈을 조금 보태주고, 죽은 환관 김중호와 최호의 아내들이 그곳에서 일하면서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도록 해줄 작정이다. 그러니 이제 그 염려는 붙들어 매거라. 더구나 환관 대령숙수는 고자이니, 그 여인들과 같이 일한다 한들 별탈이 있을 리가 없다. 서로 외로운 처지이니 잘 돕고 살아갈 것이다.
김 상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