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승려 만우가 승려 덕중에게
1465년 11월 25일
이 중놈아, 네놈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겼다. 소용 박 씨가 108을 툭 던져놓고 가버리자, 사람들이 그 비밀을 까뒤집느라고 난리법석이 난 모양이다. 정인지 대감이 108의 의미를 내놓으라고 이 땡중에게까지 염치없이 사람을 보냈더란 말이다. 똥줄이 타게 급박한 모양인데, 정 대감은 그 와중에도 108은 불교의 신성수라고 아는 척을 하면서, 은근슬쩍 비밀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내놓으라는 식이었다. 답장 없이 노자를 돌려보냈으니, 아마 지금쯤 내 욕을 실컷 하고 있을 것이다.
덕중, 이 중놈아, ‘백팔장(百八張)’에 가입하지 않는 나를 야속하다 하였지. 야속 정도가 아니라, 지금은 아예 수상쩍게 여기고 있겠지. ‘백팔장(百八張)’이라! 그 모임 이름의 의미를 알기나 하는 것이냐. 고려 때 입었던 구색(鳩色)과 비슷한 회색을 조선의 승려들은 입을 수 없고 대신에 삼베와 같은 시색만을 입을 수 있다고 세종이 금령(禁令)을 내리자, 승려들은 차라리 백팔장을 입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내버린 옷이나 죽은 사람의 옷 108장을 모아 누덕누덕 꿰맨 중놈의 가사 말이다. 여하튼 방정맞은 소용 박 씨 입이 108자를 세상에 터뜨려놓았으니, 그 백팔장(百八張)의 운명도 앞을 알 수가 없게 되었구나. 정신 바짝 차려라, 이놈아! 그동안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것을 알려주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다.
알다시피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다. 인가에서 멀지 않은, 가장 풍광 좋고 물 좋은 명당에 사찰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불교는 국가의 기본 이념이자 철학이었고, 사찰은 안식처이자 위로의 본산지였다. 목탁만 두드리면 쌀이건 돈이건 심지어 괴기까지 시주를 받을 수 있었다. 왕이 대사나 승려들에게 극진했으니, 백성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느냐. 허나 이 씨 성을 가진 자가 고려를 무너뜨렸다.
새 왕조는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받아들였다. 불교 억제정책은 불교 탄압정책으로 변하여 사찰과 ‘중놈들’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산으로 계곡으로 눈에 뜨이지 않는 곳으로 몰아냈다. 다행히 산속의 사찰은 여염집 아낙들에게 담장 밖을 나갈 수 있는 구실이 되어 주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종은 여인들이 사찰에 드나드는 것까지 금해, 절에 가다가 잡히면 자녀목에 이름을 새겨 넣겠다고까지 했다. 중들이 길을 다닐 때 도첩을 몸에 품고 있지 않으면, 개처럼 끌려가야 했다.
불교계는 세종대왕이 승하한 후에, 어떤 왕을 세워야 불교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같은 땡중이야 괴기를 먹건 우거지 죽을 먹건 마찬가지다. 그렇다 해도 출가한 이상 이 땅에서 불교의 몰락을 눈 뜨고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자(나중에 문종)는 당시 병약해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고, 그 아들은 너무 어렸다. 그래서 당시 큰 사찰의 대사들이 모여 나라의 미래를 논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을 저울질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안평대군으로 기울었다. 안평대군은 온유한 인물이다. 하여, 유교를 숭상하더라도 불교를 강하게 억압할 성품은 아니라 여겼다. 당시 안평대군이 군왕이 되리라고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림과 시를 좋아하는 그의 성품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평대군을 다음 왕으로 세우자고 뜻을 모으고, 어떻게 일을 풀어나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이 집현전 학사들과 도원에 갔던 꿈을 매우 강렬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안평대군이 그 꿈을 통해 신탁을 받았다고 믿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꿈을 그림으로 그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신탁의 열쇠라는 말을 안평대군에게 전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안평대군은 대수롭지 않게 그러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게 할 작정이라고 했다. 나는 대사님들이 시키는 대로 그림 속의 도원에 절을 그려 넣은 후, 그 안으로 백여덟 명의 사람이 줄지어 들어가는 광경을 그려야만 신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강조했고, 안평대군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안평대군은 약속한 대로 어린 왕의 즉위 1년 정월 초하루에 문사와 학사들을 불러 모았는데, 승려로써는 나 혼자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어이쿠, 그런데 그림 속에 절은커녕 사람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안평대군은 정월 초하루에 모임을 만들라는 말은 따랐으나, 신탁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꾼 꿈에, 그 꿈을 꾸고 느꼈던 감정에, 그 감정이 표현된 그림에 더 마음이 쏠려 있었다. 그는 시정을 정치성 앞에 두었던 것이다. 그는 그림에 ‘몽유도원도’라는 제첨을 붙였다. 그 그림은 더 이상 우리의 의도대로 사용되지 못했고, 안평대군과의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불교계의 기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진짜 왕이 될 만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사건은 사실 문종 임금이 즉위한 해에 일어난 일로, 안평대군이 몽유도원도를 그리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에 대한 소문이 승려들의 입을 타고 옮겨진 것은 안평대군과의 기획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였다. 그러니까 한 중놈이 도첩 없이 길을 가다 포졸들에게 잡혀 칼이 씌워진 채 끌려가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이를 보고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신분증을 깜박 잊은 것이니 목에 씌운 칼과 그 중놈을 풀어줄 것을 명령했다. 다음 날 수양대군은 형 문종 임금에게 죄 없는 승려에게 칼을 씌워 호송하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라는 상소까지 올렸다.
문제는 사간원에서 수양대군의 그런 개입을 부당하다고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관료가 법에 따라 임무를 다하고 있는데, 수양대군이 왕족의 권한을 이용하여 도첩을 지니지 않은 승려를 풀어준 것은 사헌부뿐만 아니라 왕권에 대한 도전이다, 수양대군을 벌해야 한다는 강력한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문종은 승려의 칼을 벗긴 것은 측은지심이었고, 더구나 이를 즉각 왕에게 보고했으니 임금의 권위에 도전한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감싸며 무마했다.
이 이야기가 퍼져 나가자, 승려들 사이에 신비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수양대군이 승려의 입장을 존중했다는 사실과, 이로 인해 자신의 처지가 몹시 불리해졌는데도 승려들을 저버리지 않고 변호했으며, 도리어 왕의 신임까지 얻어낸 능력에 놀라워했다. 이 사실이 중들 사이에 알려지자, 다들 불교계의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본 듯 흥분하기 시작했다. 과거 불교와 승려들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뭔가 해야 한다는 상승된 기운이 도처에서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안평대군과의 조율에 실패한 뒤여서인지, 수양대군의 부각은 그의 난폭함과 거친 성격조차 모두 잊게 만들었다.
도첩 때문에 칼을 썼다가 풀려난 중놈이 바로 덕중 네놈이 아니냐. 수양대군이 네놈을 구했던 사건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몇 년 뒤에서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는데, 심심산골 수도승에서부터 문전에서 비럭질하는 탁발승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기쁘게 받아들였다. 수양대군을 새 왕으로 모시자는 중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아졌다. 안평대군의 결정이나 의도를 미적미적 기다리던 때와는 달리, 승려들은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들처럼 싸울 준비를 하고 나섰던 것이다. 당시 수양대군은 불경도감을 설치하고 수미대사, 신미대사, 학조대사 등의 승려들을 불러 불경을 간행하고 언해하고 있었으니 우리로써는 부처의 뜻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우리는 불교를 일으키고 부흥시킬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도 중요했지만, 왕이 불교의 도움 없이 통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부각 시켜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었다.
유교의 성리학적인 윤리관에 따르면 적장손만 왕통을 계승할 수 있고, 적장손이 대가 끊기면 양자를 들여서 이를 계승해야 한다. 이런 윤리적인 기준을 마련한 것은 과거 집현전 학자들로, 성삼문, 박팽년 등이 끝까지 어린 왕을 복위시키려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불교계는 왕자들 중 그 누구건 가장 현명한 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나 백성을 참된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라는 윤리관으로 수양대군을 세뇌시켰다. 모든 것을 비유와 은유로 알렸다. 마침내 수양대군은 그것을 이해했고, 그리고 결단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네놈과 수양대군의 우연 같은 만남이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면 내가 왜 ‘백팔장’에 가입하지 않았냐고?
왕이 요즘 ‘몽유도원도’를 찾고 있다고 들었다. 그것도 소용 박 씨가 108글자를 입 밖에 낸 다음에 말이다. 현왕은 ‘몽유도원도’에 관해 얻어들은 적은 있지만 직접 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을 빌미로 안평대군이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을 짐작하지만, 그곳에 누가 있었는지 알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백팔장’에 가입하지 않은 이유는 정인지 대감이 지금 ‘몽유도원도’를 찾아 헤매는 이유와 같다. 우리는 그 그림에 찬시를 붙였다. 안평대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모인 비밀모임에는 정인지도 신숙주도 있었다. 그들은 나와 달리 그림을 보러온 것이었지만, 어쩌면 그들도 모임의 저의를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아니 몰랐을 수도 있다). 왕의 사돈이 된 정인지와 영의정이 된 신숙주가 과거 안평대군을 왕으로 세우려는 모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고, 마찬가지로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의심을 사서 불교계 전체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상전하의 불교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가서 깨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백팔장’에 가입하지 않은 이유를, 킁, 대사들이야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어리석은 네놈이 어떻게 알았겠느냐. 내가 이리저리 떠도는 것도 같은 이유인 것을! 불교와 부처와 네놈을 위해서인 것을.
이 중놈아! 이것이 바로 정인지 대감 대신, 네놈에게 서찰을 써서 보내는 이유다. 어떻게 정인지 대감에게 이런 사실들을 알려주며, 알려주려다 서찰이라도 발각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나는 앞으로도 계속 떠돌 것이니, 답신일랑 쓸 생각을 아예 말거라. 더 이상 나를 찾을 생각도 말거라. 나는 안평대군에게 신탁과 그림 운운하다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땡중 중의 땡중이 아니냐. 그 인과로 나는 끝없는 떠돌이 수행을 해야만 할 것이다. 죽은 덕중이 년의 유언 때문에 백팔장의 정체가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만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