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하동 부원군 한명회가 상당 부원군 정인지에게
1465년 11월 25일
막 종루의 파루1가 울렸다네. 하나, 둘, 셋… 아홉, 열, 나는 속으로 쇠종 소리의 숫자를 세고 있었지. 종루의 종소리를 세는 일은 수년 계속되어온 습관인데, 아마 내가 하나를 놓친 모양인지 오늘은 서른두 개 밖에 되지 않았네. 서른세 개건 서른두 개건 달라질 것은 없는데, 이런 하찮은 것까지 신경이 쓰이는 것 보면 내가 늙었거나, 아니면 호열자처럼 요즘 장안을 휩쓸고 있는 숫자놀음에 나도 모르게 물이 든 모양이네.
몸이 아프다며 입궐이 뜸하시니, 어쩐 일이신가? 지난 번 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은 주상전하께서도 별로 문제 삼지 않으시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시게. 이 말이 위로가 될지 모르나, 같은 부원군이긴 해도 나와 대감은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닌가. 대감은 과거시험의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오셨고, 세종 때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승승장구하신 분이니 예나 지금이나 당연하게 존경의 대상이 아니신가. 나야 볼품없는 팔삭동이에 한때 경덕궁지기였으니, 지금은 높은 자리에 있다 하나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하찮은 인간이라는 경멸이 자리 잡고 있다네. 물론 우리에게도 공통점이 있고말고.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이 되었고, 수양대군이 왕으로 즉위한 후 내 딸은 해양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고(이미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네!), 자네의 아들은 왕의 외동딸인 의숙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으니, 우리 둘 다 정난공신이면서 왕과 사돈지간이 된 것이네.
상당 부원군 대감, 소용 박 씨가 남긴 108자를 두고, 궐 안에서는 훈민정음 언해에 대해 구구절절 말들이 많지만, 궐 밖에서는 108자(者), 즉 108명의 사람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들으셨나? 그 108명이라는 것이 108명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말도 들으셨나? 요즘 백성들은 왕이 몇 명을 죽였는지 세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고 하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는가. 안평대군을 포함해서 계유정난에 죽어간 사람들로 시작해서,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일을 꾸몄다가 줄줄이 죽어간 집현전 학사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그렇게 본 듯이 세세하게 이야기들을 하는지. 그런데 상당 부원군 대감, 놀라지 마시게. 그 이름들 중에 대감 이름과 내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고 하오. 멀쩡하게 산자들을 죽은 자 이름 속에 넣다니! 무슨 말인가 했더니, 사연이 이러하네.
명나라에서 새로 왕위에 오른 현왕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을 보낸 일이 있지 않은가. 조정에서는 창덕궁 광연전에서 잔치를 열 계획이었는데, 이날 성삼문의 부친, 그러니까 당시 도총관이었던 성승과 평안도 제찰사를 지낸 유응부가 운검을 맡았었지. 임금 뒤에 서서 칼을 들고 호위하는 일말일세. 그런데 말이네. 몇 번을 생각해도 그들에게 칼을 맡겨 왕 뒤에 세워놓은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네. 찜찜한 그 느낌을 털어버릴 수가 없었어. 연회장소가 좁으니 운검을 없애는 것이 어떠시겠느냐고 은밀히 의견을 올렸고, 내 의도를 파악하신 임금께서 운검을 거두셨다네.
그 다음 일은 아시지 않는가. 사실 그날 성승과 유응부는 운검을 핑계 삼아 왕과 세자를 없애기로 계획하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질 등은 자네와 나, 그리고 신숙주와 권남 등을 죽이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나. 역모를 기획하고 있다가 계획이 차질이 생기자, 소심한 김질이 장인이자 당시 좌찬성이었던 정창손에게 가서 그 사실을 고했고, 정창손은 다행히 시간을 놓치지 않고 왕께 역모가 계획되어 있었음을 알리지 않았나. 그때 그 상황을 제때 파악하지 못했다면, 나와 자네는 물론이고 신숙주도 이미 죽은 목숨 아닌가. 이 이야기가 흘러 다니면서 우리 이름이 들먹거려진 모양이니, 비록 108명 죽음의 명단에 올라간 것은 아니나, 까딱 잘못했으면… 모골이 송연해지지 않으신가. 그렇게 누워계실 때가 아니네. 기운 내시게.
어디 그뿐인가. 현왕의 동생이신 금성대군이 어린 조카를 다시 복위하려는 움직임까지 포함되면서 백성들이 헤아리는 숫자는 100명을 넘어서고 있다고 하더구먼. 사실 많이 죽었지. 금성대군뿐만 아니라 어린 왕을 키웠던 혜빈 양 씨와 상궁 박 씨, 심지어 환관 엄자치까지 연루되지 않았나. 어린 왕의 마지막 남은 측근들이었지. 놀란 어린왕은 이들을 살려만 준다면 왕좌를 내놓겠다고 했고, 정말 왕좌에서 물러났었지. 하지만 그 측근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고 전부 황천길로 떠나고 말았네. 일시에 왕좌도 잃고 주변의 몇 안 되는 측근까지 모두 잃었으니, 그 망망대해에 혼자 남겨진 어린 마음이 어떠했을꼬…!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하여간 그 사건만으로도 이십여 명이 죽어나갔네. 백성들은 누가 백 명의 이름들을 차례대로 잘 외우는지 내기를 한다고 들었네. 이 얼마나 위험한 놀이인가? 대감, 지금 그렇게 누워 계실 때가 아니네. 기운을 차리시게나.
과거 계유정난 이전처럼 우리 모두 다시 뜻을 합쳐야 할 것이네. 그래서 말인데, 오랫동안 변방의 국경지대를 관리 감독하고 있는 양산군 양정이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주상전하께 주청드릴 생각이네. 지금 생각하니 그를 너무 오랫동안 변방에 둔 것 같네. 양산군 양정은 계유정난 때 철퇴로 김종서 머리를 날린 사람 아닌가. 무식할 정도로 씩씩한 그 사람이 돌아오면 맥 빠진 우리 분위기를 되살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네. 과거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주상전하를 위로해드리고 전하의 새로운 힘이 되어 드리도록 하세나. 양산군 양정은 술도 좋아하니, 그가 돌아오면 상당 부원군 대감도 입궐하여 전하와 함께 다시 술잔을 들기로 하세나. 추운 날씨에 강녕하시게.
한명회 올림
1 조선시대에는 새벽 4시경 33번의 쇠북을 쳤는데 이를 파루라 한다. 파루가 울리면 도성 문이 열리면서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