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상선 김처선이 상선 전균에게
상선 김처선이 상선 전균에게
1564년 11월 2일
균아.
이렇게 이름을 불러보는 것이 정말 얼마만이냐. 같은 궁궐 안에 살면서도 십 년이 넘도록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이런! 네 이름을 부르니 목구멍이 뜨거워지면서 죽은 엄자치 이름까지 떠오르는구나. 전균, 김처선, 엄자치. 우리 셋은, 주변에서 시기할 만큼, 아끼던 관계였다. 고향도 나이도 출신도 달랐지만, 친형제보다 더 가까웠고 서로를 더 신뢰했다. 생식기가 불완전한 남자들의 비애를 그 누가 알겠느냐! 그 고통과 울분을 지닌 우리가 서로 적대하면 더 이상 떨어질 나락이 없다 여겼었다. 그래서 서로 힘을 합치고, 돕고, 영원히 서로 아껴줄 것을 맹약했었다. 더러운 세상사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했던 우리의 관계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진흙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엄자치가 저 세상으로 간지 십 년이 가까워오니, 아! 세월이 무상타 할 것이다. 계유정난 때 자네와 엄자치는 공을 세웠다 하여 환관으로써는 드물게 공신에 봉해졌지만, 나는 영문도 모르고 꽁꽁 묶여 유배를 가는 중에 석방하라는 명을 받고 풀려났다. 아마 계유정난 뒷정리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지 싶다. 그 다음 현왕의 즉위와 함께 자네는 판내시부사가 되고 나는 고신을 환급 받았으니, 우리 셋이 다시 잘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데, 우리들의 운명은 계속 다른 방향을 향해 치닫고 말았다. 계유정난으로 2등공신에까지 올랐던 엄자치는 어린 왕의 폐위를 반대했다가 목숨을 잃었고, 엄자치와 같은 색깔이라고 여겨졌던 나는 관노로 전락했다. 엄자치가 죽고 내가 관노로 노역에 시달리며 간신히 목숨을 연명할 때도, 자네는 환관으로써는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배를 가던 도중에 풀려났건 것처럼, 나는 관노에서도 다시 해방되었다. 이 또한 역모 뒷정리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지 싶다. 매번 아무런 관련 없이 사건에 휘말리고 또한 묘하게 그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것이 내 운명인 모양이다. 한 3년 지나자, 그동안 내가 별 죄 없이 고생한 것을 아셨는지, 주상전하께서 원종 3등공신이라는 직위를 내려주셨다. 하지만 이후로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곤장도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직급은 점점 높아져, 임시직이기는 하나 상선 자리에 올랐다. 상선이라고 다 같은 상선은 아니네! 자네는 왕의 신임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상선이고, 나는 빈자리를 임시로 메우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상선’이니, 그 역량이나 영향력에서 비교할 바가 아니지. 두 상선 중에서, 환관들은 자신들을 감독하는 판내시부사를 높은 직위로 여기지만, 왕의 입장에서는 가장 신임하는 자에게 수라상과 궐내 음식에 대한 감독권을 주는 것이 아니냐. 자네는 왕의 생명과 직결되는 음식을 감독하는 상선이 되었고, 별로 신임이 두터울 것 없는 나에게는 판내시부사 자리가 임시로 주어진 셈이다.
균아.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맹약했던 친구로서 하는 말이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기 바란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환관들 사이에 탈모현상이 나타나는 치들이 있다고 들었다. 무슨 뜻인지 짐작할 것이다. 남성액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니겠냐. 이 때문에 환관들 사이에 ‘진짜 고자’와 ‘가짜 고자’라는 말이 생겨났고, 바짓가랑이를 내려 확인해야 한다는 말까지 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어떻게 그런 잔인한 일을 할 수 있겠나.
그래서 말인데, 혹여 이런 현상과 관련하여 짚이는 것이 없는가. 자네에게 상의하는 이유는 혹여 최근에 환관들에게 예전과 다른 음식을 지급하였거나, 새로운 종류의 차나 약을 지급한 일은 없는지 알고 싶어서네. 성한 음낭을 달고 궐에 들어올 용감무쌍한 자가 있을 리 만무하니 말일세. 이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운 이유는 자네 소임이 궐내 음식물 감독이니, 자칫 자네가 잘못한 것으로 지적당하는 느낌을 받을까 염려되어서이네. 나는 단지 환관들의 외모에 일어나고 있는 이상 징후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자네의 도움을 받고자 하니, 이 친구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기 바라네.
그 원인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이 추운 날씨에, 굳이, 그 가엾은 녀석들의 바짓가랑이를 끌어내릴 필요도 없을 것이고, 우리 또한 그것을 확인해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원인을 찾아낸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일세. 음식이나 약물이 아니라면 내 생각에는, 궁형으로 인한 고자가 아니라 선천적 고자들에게 어떤 신체적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도움이 될 만한 것, 자네가 아는 것이 있으면 좀 알려주게나.
언제 기회가 되면 만나서 술이나 한잔하세나.
옛 친구 처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