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영의정 신숙주에게
1465년 10월 4일
범옹, 몽유도원도와 관련하여 승려 만우에게 서찰을 전달했네. 답장을 받아들고 오라고 노자에게 시켰으나 빈손으로 돌아왔네. 하기야 산천을 구름같이 떠도는 자가 몽유도원도의 행방을 알 리가 있겠는가. 그 자야말로 도원을 혼자 거닐고 있으니 말일세.
범옹,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는 권당(捲堂)을 벌였다는 이야기 들으셨나. 훈민정음 언해를 『월인석보』에 넣어 놓고, 과거시험 문과초시에서 훈민정음을 강(强)하도록 한 것은 유생들을 불생으로 만들려고 하는 저의가 들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하네. 참나, 『월인석보』안에 훈민정음 언해가 들어있는 것은 이미 다들 알고 있던 사실인데 지금에서야 갑자기 그 일을 끌고나와 이렇게 문제 삼는 것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일세. 소용 박 씨의 유언 뒤에 무엇인가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들이 싹터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들쑤시고 뒤집어 뭔가 숨겨져 있는 것을 찾아보자는 심사가 아닌가 말일세.
『월인석보』가 간행된 계기를 돌아보면, 유교적 이념에 충실하셨던 세종 임금께서 갑자기 불교에 빠져든 탓이었지. 그 이유는 이념이니 철학이니 하는 그 무엇도 아닌 인간의 깊숙한 슬픔에 기초한 것이었다네. 세종 임금께서는 훈민정음 반포를 앞둔 시점에 다섯 번째 왕자이신 광평대군과 일곱 번째 왕자이신 평원대군을 한 달 사이로 잃지 않으셨나. 갓 스물을 넘긴 젊고 건강한 왕자들이 한 달 간격으로 갑자기 명을 달리하셨지. 충격을 받은 소헌왕후는 몸져누우셨고, 급기야 승하하시고 말았으니. 생각해보게. 장성한 두 왕자를 어이없이 잃고 애틋해하시던 소헌왕후까지 떠나보내셨으니. 세종임금께서는 급기야 삶의 의미까지 잃었다네.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이념이 유교임을 강력하게 천명하신 왕이시지만, 막상 극심한 고통과 한계 앞에 부딪혔을 때, 위로를 받을 무엇인가를 찾게 되신 것이지.
세종임금이 불교와 가까워지신 것은 수양대군이 사가에 승려들을 불러들여, 형제왕자들과 모후왕비의 명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불공을 드린 것이 시작이었지. 게다가 수양대군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석가모니 일대기를 쓴 『석보상절』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부왕에게 갖다 바쳤지. 그 글을 읽고 감동한 세종 임금은 뒤따라 『월인천강지곡』을 짓기 시작하셨고. 월인천강의 ‘월(月)’은 부처를 상징하므로, 부처의 자비가 중생들에게 선명히 ‘비친다’는 뜻이 아닌가. 죽은 왕후를 위해 왕이 589편이니 되는 긴 서사시를 지어 내셨으니 그 애틋함과 슬픔의 깊이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이런 과정에서 태어난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은 왕과 세자의 비호를 받으며 간행되지 않았나.『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치는 일은 세종임금 때 시작되었던 것으로 아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되었네.
합본 작업이 다시 시작된 것은 현왕이 즉위하고도 이삼 년은 지난 뒤일 걸세. 그 계기는 아마도 의경세자를 잃으신 후가 아닌가 하네. 즉위하신 후 맞은 가장 큰 시련이 세자를 잃는 슬픔이셨으니, 그때부터 다시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합본 작업을 하신 것이지. 세종 임금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잃은 슬픔의 결과물이『월인석보』랄까. ‘월인’은 월인천강지곡’에서 ‘석보’는 ‘석보상절’에서 각각 따온 것이고,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석보상절』을 그에 대한 주석의 형식으로 한 것이지.
세종시절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에 사용된 한글 자형이 네모꼴이라면,『월인석보』에 쓰인 활자체는 획이 더 부드러운 직선이 아닌가. 방점과 아래아가 권점에서 점획으로 바뀐 것도 알고 있을 것이네. 합본이라도 내용의 추가나 표기법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는 아무래도 불경에 더 가깝게 하려는 의도가 들어갔기 때문일 걸세. 『월인석보』 작업에 승려들도 참여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네.
범옹, 내가 이렇게 『월인석보』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를 아시겠나. 세종임금이 유교에서 불교로 전향한 것이나, 궁궐에서 불교서책들을 편찬한 것이나, 심지어 궐 안에 내불당을 짓게 된 과정의 시초에, 이렇듯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수양대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이네. 현왕께서는 아예 처음부터 유교가 아니라 불교를 숭상할 생각이 계셨던 것 같지 않나. 우리가 모르는 어떤 기획이 처음부터 세워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생기니, 아무래도 이런 위험한 생각은 떨쳐버려야 하겠지. 지금에서야, 이런들 저런들, 어찌 다른 방도가 있겠나. 백팔에 정녕 어떤 비밀이 있다면, 불교와 관련이 깊을 것이라 여겨지네. 그래서 승려 만우에게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었으나, 만우는 아무런 답장 없이 노자를 그냥 돌려보냈네.
범옹, 몽유도원도가 안평대군의 별장에 있었다면, 내 생각에도 아직 그곳에 있을 것 같네. 다른 대책이 없으니 자네가 열심히 별장 안을 뒤져 보는 수밖에 없겠네.
정인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