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상차 강원종이 상선 전균에게
1465년 8월 10일
상선 어른, 원종이년이옵니다. 몸과 목소리가 가늘다 하여 이놈을 이년처럼 곱게 여기시니, 행운이라 할 것이옵니다. 환관들 사이에서도 ‘아씨’라고 불리니 듣기가 싫지 않사옵니다. 뽕잎에 박힌 구멍이 108이라는 상선 어른의 해석을 들으니 그 예리하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인은 전 상선 어른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상선 어른의 서찰을 받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생각이 별로 없는 년이지만, 요즘 자주 마시는 뽕잎차 때문인지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되었습니다. 웬 뽕잎차냐고 물으신다면 누구처럼 오줌발이 약해서는 아니고, 주상전하께서 찾으시지도 않는 뽕잎차를 만든답시고 잠실을 자주 드나들었으니,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소인이라도 죽어라고 마셔야 할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상선 어른, 이 몸이 주상전하의 차를 책임지고 있는 상차(尙茶)아닙니까.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차와 연결되는데, 뽕잎차를 마시다가, 제 딴에도 생각이라는 것을 해 보는 것입니다. 108은 차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 말입니다. 차와 백팔, 앞뒤가 잘 꿰맞춰지지 않지만, 상선어른의 풀이를 이년도 응용해 보면 뭐 그냥 이렇습니다. ‘차’라는 한자를 가만 어떻게 쓰더라, 아무튼 머리가 나빠서, 이렇게 쓰면 대강 맞지요?
茶 = 十 十 八 十 八
상선어른께서는 이미 이년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차(茶)는 이십+팔십팔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이들을 합치면, 차도 백팔이 아닌지요? 구멍 난 뽕나무 잎사귀도 백팔, 차도 백팔, 가만 이게 어떻게 되나, 더하고 빼고 뭐 머리가 아파서 셈하기가 어렵습니다. 뭐, 이래저래 갖다 붙이면 백팔이 아닌 것이 없지요.
먹물이 많이 든 어른들은 백 팔자가 훈민정음 언해를 지칭한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먹물처럼 한번 획을 그으면 지울 수 없듯이, 한번 그러려니 하면 그렇게 믿는 분들이라,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상선어른, 소인은 한때 정음청에서 일했습니다. 그때 얻어둔 훈민정음 언해 원본을 어디 쑤셔 넣어두고 있었는데, 최근 다들 훈민정음 언해와 백팔이 어쩌구저쩌구 해서 꺼내 보았습니다. 훈민정음 언해본 원본과 『월인석보』 속의 훈민정음 언해본이 다들 똑같다고들 하는데, 제대로 첫 장이나 펼쳐보고 하는 말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년이 별 생각 없이 꼬불쳐둔 훈민정음 언해본 원본과 『월인석보』를 비교해보니, 떠도는 소문과 달리 첫 장부터 상당히 달랐습니다. 두 권의 책을 보내니 첫 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훈민정음 언해본 원본1 첫 장
『월인석보』 1권의 첫 부분에 들어있는 훈민정음 언해본 첫 장
세종 임금께서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만든 언해본은 제목이 ‘훈민정음’으로 시작되는 아주 얇은 단행본입니다. 그런데 현왕의 재임기간에 발간한 『월인석보』 1권의 첫 페이지에는 ‘세종어제훈민정음’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고, 이어지는 4행의 글자가 뒷부분의 서체와 다르지 않는지요. 수정해 넣은 것이 확실하지만… 이년의 머리로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어, 앞뒤가 잘 꿰맞춰지지 않습니다. 뭐, 이년이야 두 서책을 비교할 능력도 그럴만한 식견도 없으니, 첫 장만 열어서 비교해 본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데, 처음이 다르면 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지요.
강원종 배상
붙임: 두 서책은 살펴보시고 돌려주시면 좋겠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1 세종 당시 간행되었으리라고 추정하는『훈민정음 언해본』을 문화재청과 경상대 연구팀이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복원(2008년)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훈민정음 언해본은 세조시절 발간된『월인석보』 1권에 들어 있는 「세종어제 훈민정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