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회
성균관 정앙이 성균관 대사성1에게
1465년 7월 27일
대사성 대감,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나고 보니, 안부부터 여쭙지 않은 무례를 범했습니다. 강녕하신지요?
이 나라 최고 학문기관인 성균관에 몸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대사성 어른 아래서 후학을 기르는 일에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학록(學錄) 정앙입니다. 요즘 성균관은 동무(東?)·서무(西?)·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할 것 없이 모두 나쁜 기운에 휘말려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곳저곳의 모든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는 권당(捲堂)을 저지르거나 시위하느라고 일제히 성균관을 떠나는 공재(空齋)를 행할 태세입니다. 무엇 때문인지 대감도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최근 소용 박 씨의 백팔 글자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여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성균관 재회(齋會)를 열었던 모양입니다. 재회(齋會) 임원인 장의(掌議)·상색장(上色掌)·하색장 들이 성균관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에 모여 훈민정음 언해본이 정말 백팔 글자인지 확인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존경각의 훈민정음 언해본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없었다고 합니다. 어이없고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존경각의 관원에게 훈민정음 언해본을 빌려달라고 했더니, 관리가 슬그머니 내민 것은 『월인석보』였다고 합니다.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묶은 불교서적이 아닙니까. 훈민정음 언해본을 찾는 유생들에게 불교서적을 내밀다니요!
훈민정음 언해 원본이 존경각(尊敬閣)에는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았고, 빌려간 기록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존경각에서 훈민정음 언해본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따졌더니, 누가 가져갔는지 수소문을 해볼 동안, 아쉬운 대로 『월인석보』 1권에 들어있는 훈민정음 언해본을 보라고 했답니다. 요즘 문과 초시를 준비하는 자들이 많아 훈민정음 언해본들을 몰래 빼내간 것 같다고 했답니다. 『월인석보』 1권에 들어있는 언해본의 내용이 원본과 똑같으니 가져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다들 『월인석보』를 구해서 그 안에 들어있는 훈민정음 언해본을 읽는다고 했답니다.
대감, 성균관 재회 임원들의 말을 듣고 심히 놀라 망설이다가, 이렇게 대감께 서찰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한갓 재회 임원들이 모여 논한 이야기에, 왜 소인이 이다지도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문과 초시는 생원시와 진사시가 아닙니까. 이에 합격한 유생(儒生)들이 들어와서 공부하는 곳이 바로 성균관입니다. 그런데 그 문과 초시를 위해 훈민정음 언해를 공부할 때 『월인석보』를 찾아서 읽을 수밖에 없는 형국입니다. 불교 경전 앞에 들어 있는 훈민정음 언해본에 코를 박고 글을 익혀서 과거장에 나가야 하다니, 이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성균관에 들어오는 생도들이 자칫하면 유생(儒生)이 아니라 불생(佛生)이 되어 들어올까,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감, 조선은 유교를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나라의 향방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판국에 이렇게 방관만 하고 있어도 되는 것인지요? 훈민정음은 과거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 최항,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이개, 강희안 등 유교사상으로 똘똘 뭉친 학사들이 세종 임금을 도와 만든 글자입니다. 백성에게 전달될 때도 바로 그런 유교의 기본인 인의예지를 전할 수 있는 글자여야 합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이 『월인석보』 1권 맨 앞에 실려 불교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유교학자들이 만든 훈민정음 언해 원본이 온데간데없이 다 사라져버리고, 다른 책도 아닌 불교경전과 부처의 일대기를 다룬 『월인석보』와 묶여 돌아다니고 있다니, 이 어찌 순수한 의도라 하겠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무리의 음모가 들어 있지 않은 한,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재회 임원들의 이 같은 이야기를 들은 유생들은 저마다 통분하고 그 음모를 추리하며, 더욱 더 소용 박 씨의 백팔 자의 비밀에 매달리는 모양입니다.
대감, 이 나라는 불교국가가 아니라 유교 국가가 아닌지요?
조선은 유교인 공자의 사상과 도를 건국이념으로 표방(標榜)하였습니다. 국왕을 비록한 통치자들이 유교 서적을 통해 교양과 덕을 쌓고 이로써 백성을 교화하는 통치를 실현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유교 이념에 의한 문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유교 경전을 과거제도의 시험과목으로 정하고, 또한 국왕과 신하들이 유교 경전의 내용을 토론하면서 나라경영에 대해 논의한 경연제도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작금의 현실을 어디 유교국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궐에서는 더 이상 경연을 열지 않고, 국왕과 신하가 유교 경전을 논하기는커녕 학사들은 왕의 용안조차 뵙기 힘듭니다. 학문의 요람이었던 집현전이 폐지되어 유교 학문에 대한 성찰이나 토론이 사라져버렸고, 집현전에 보관하고 있던 책들이 홍문관이나 장서각으로 넘어가면서 그 관심이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유교 경전보다 불교 서적들이 점점 궐 안을 채우고 있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문과 초시에 채택된 『훈민정음』 언해본을 유교 경전이 아니라 불교 서적을 통해 읽어야 한다면, 이것은 유교 국가가 아니라 도리어 불교 국가가 된 것이 아니겠는지요.
대감,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요?
대감, 소인은 세종 시절에는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집단 상소에 동참하였고, 또 내불당 건립 때는 수업을 거부하는 권당(捲堂)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대감께서도 아시다시피, 소인은 머리로 생각만 하고 몸은 움직이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은 아닙니다. 만약에 몸을 그렇게 사렸다면 소인은 성균관 관직 중 거의 꼬리에 해당하는 학록에 머무르지 않고, 최소한 박사(博士)나 악정(樂正) 혹은 제주(祭酒)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높은 관직을 바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거꾸로 높은 관직을 위해 몸을 사린 적이 없음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대감, 바라옵건데 훈민정음 언해본을 다시 독립적으로 찍든지 아니면 유교 경서들과 같이 묶어 진정한 유생들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목숨을 건 투쟁을 할 생각입니다. 이는 소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대다수 유생들의 생각이오니 살펴주실 것을 간청드립니다.
대감, 우리가 시절에 따라 마음을 챙겨 목숨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허나 대장부의 기개로 그것에만 머물 수 없는 중요한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서찰 한 통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세상이니, 이 서찰로 목숨의 위태로움을 느끼시면 모르는 척 찢어버리십시오. 목숨을 위해 철학도 이념도 버리시는 분에게 목숨을 건 상의나 그 이상의 고민을 털어놓을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직도 유학자로써의 청렴함과 순수한 의지가 남아 있으시다면, 사태를 돌아보시고 조처(措處)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정앙 배상
1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이 있었고, 그 아래에 좨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