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봉원 부원군 정창손이 상당부원군 한명회에게
1465년 7월 23일
부원군 대감, 강녕하시오?
훈민정음 백팔 글자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속 시원하게 알려달라는 대감의 전갈을 받고 웃었네그려. 상당부원군이 모르시는 일을 내가 알 리 만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상당부원군의 요청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나그려. 부원군 대감의 요청이라면 없는 일을 만들어서라도 알려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신문자 창제를 반대한 7인회는 이제 유명무실하네그려. 사실 신문자 창제를 반대했다가 찬성했다가 다시 반대하는 등 조삼모사의 태도를 보였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지금은 세상을 뜬 김문이었다네. 다들 김문과 나를 착각해서 그런 말들을 하지만, 당시 나는 내 소신대로 훈민정음 창제반대 상소에 이름을 올린 것뿐이고, 지금은 그것을 후회하고 있기도 하네그려.
훈민정음 어제 언해본이 어떻게 백팔 글자가 된 것이냐? 그것은 세종대왕의 뜻이 아니셨네. 지금의 왕이자 당시 수양대군께서 그렇게 하신 것으로 알고 있네그려. 사람들이 간절한 소원을 빌 때 부처님께 백팔 배를 올리지 않나. 당시 수양대군께서 부왕인 세종의 명을 받고 언문청에서 백팔 배 하는 심정으로 문자를 다듬으셨네그려. 세종대왕께서 창제의 목적과 그 사용법에 주력하셨다면, 수양대군은 훈민정음의 글자의 배열이나 구성 등 미학적인 것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듯 했네. 그것이 나를 감동시키기까지 했지. 생각해보게 그려. 1445년에 완성된 신문자를 1448년에 반포했으니, 그 3년 동안 무엇을 했겠나. 그 기간이 바로 수양대군이 글자의 배열이나 글자 수 등을 맞추어 아름다운 글자로 다듬으신 기간이 아닌가그려.
그런데 상당부원군 대감, 이상한 것은 훈민정음 한문본을 언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이 세종 임금 때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그런데 부원군 대감의 서찰을 받고 세종대왕 당시 언해한 언해본 원본을 구해 보려 했으나 잘 구해지지를 않았네. 세종 임금 당시에는 신문자 창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니 언해본 원본 따위를 집에 보관해 둘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이제 와서 막상 필요해서 그것을 찾아보니 손에 넣기가 쉽지 않았네 그려. 이유를 알아보니, 지난 문과초시에서 훈민정음을 강(講)하라는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은 명이 있고 나서부터 훈민정음 언해본 원본을 찾는 자가 너무 많아 그렇다는 것이네그려. 허 참.
사실 과거 세종 임금께서도 훈민정음을 발표한 해에 언문 과거령을 내리긴 했네그려. 하지만 그때는 최만리 대감 등 언문 반대파들의 거센 항의 때문에 문과의 과목으로는 하지 못하고 잡과와 하급관리 시험의 과목으로만 정하셨네그려. 그 다음 해에는 훈민정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다른 시험을 치를 수가 없다는 교지를 내리시기도 했지만, 이것도 전부 하급관리 시험에 관한 것이고 문과시험에서는 훈민정음을 감히 채택하지 못하셨네. 하지만 현왕은 그 결단력이 달랐네. 그렇지 않은가. 문과 초시에 『동국정운』과 『홍무정운』에 더하여 『훈민정음』을 강하라는 명을 내리셨잖은가. 이후로, 수많은 문과 과거 응시생들이 『훈민정음』1책자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네. 그러다보니 책자가 모자라 난리가 난 모양이네그려. 쩝.
그래서 이 몸은 『월인석보』 1권에 실린 훈민정음 언해본을 참조할 수밖에 없었네. 훈민정음 원본을 찾지 못한 많은 과거 응시생들도 할 수없이 『월인석보』를 구해가고 있다고 하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월인석보』에 훈민정음 언해본을 함께 넣어놓았으니, 현왕은 참으로 현명한 분이시네.
헌데, 상당부원군 대감, 내가 언문청 앞을 지나가다가 젊은 학사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네. 어디서 많이 보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누군지 금방 기억해낼 수가 없었는데, 그 자가 자신을 정앙이라고 소개해서 깜짝 놀랐네그려. 정앙이 누구냐 하면, 자네는 당시 궐 밖에서 경덕궁을 지키고 있었으니 궐내 이야기를 잘 알지 못할 걸세. 그러니까 정앙이 누구냐 하면, 세종임금은 말년에 왕비를 잃은 슬픔에 문소전(文昭殿)의 서북쪽 빈터에 내불당을 건립하려했다네. 유교를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삼은 나라에서 궐 안에 절을 세우겠다니, 왕의 그런 뜻을 전해들은 대신들과 관료들은 펄쩍펄쩍 뛸 수밖에 없었네 그려. 문제는 이 같은 왕의 지시가 있자 집현전, 의정부,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 및 육조, 성균관, 예문관, 종학, 첨사원, 종부시, 중추원 등 거의 모든 관청이 그 어명을 철회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나섰네. 그 이후 왕과 신하들의 대립이 점점 심해졌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떠들썩한 사건이 성균관 유생들의 단체행동이었다네. 내불당 건립을 반대하며 유생들이 단체로 주상전하께 하직 인사를 드리는 글을 써서 올린 것이었네. 세종 임금이 분노하시어 즉시 유생들을 구속하도록 좌승지를 통해 의금부에 지시하셨네. 하지만 좌승지나 의금부가 유생들을 구속하지 않았다네. 왕의 명을 거스를 정도였으니, 얼마나 거센 반대와 위급한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네그려. 그러자 세종 임금께서는 유생들 대신에 도승지와 좌승지 그리고 의금부 관리들을 하옥시키는 사태까지 이르렀던 것이네. 내불당 건립은 세종임금 말년에 일어난 몇 년에 걸친 긴 싸움이었다네그려. 그런데 그때 성균관 유생들의 단체 행동을 주도했던 자가 바로 정앙이었다네.
정앙은 당시 성균관 유생들이 큰형처럼 믿고 따르는 자로 대신들이나 관료들도 그의 존재를 무시하지 못했다네. 더구나 집현전 학사들이나 유교를 숭상하던 당시의 대신들은 성균관 유생들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그를 부추기는 측면도 있었네그려. 정앙과 유생들은 “불교는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혹세무민하니 국가에 해롭다”라고 외쳤대곤 했지. 나도 당시에 내불당 건립에 반대한 것은 사실이네. 그것 때문에 삭탈관직 당했다가 복직되었지만 말일세. 내가 다른 사람들을 선동했다는 소문도 나름 정앙과 착각해서 한 말이라네. 나도 내불당 건립에는 반대했지만, 정앙처럼 다른 이들을 선동한 것은 아니었네그려. 훈민정음 반대 상소건도 그렇고 내불당 건립건도 그렇고 사람들이 유독 내 뜻을 곡해하거나 과장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궐내에 내불당을 짓는 것은 반대했지만, 사람들을 선동하지는 않았다네. 기회가 되면 이 사실을 꼭 주상전하께 귀띔해 드리게나.
부원군 대감, 당시 나는 승하하신 부왕 세종임금과 소헌왕후를 위해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이 불교에 귀의한 것에 대해 이상히 여기지는 않는다네. 더구나 부원군 대감, 대감의 서찰덕분에 훈민정음 언해본을 읽기 위해 『월인석보』를 펼치게 되었고. 부처의 일대기까지 조금씩 읽게 되었다네. 아마 훈민정음 언해본을 찾는 자들이 이렇게 『월인석보』를 같이 읽게 되니, 이 또한 주상전하의 깊은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네.
백팔 글자에 대해 속 시원하게 알려달라고 했는데, 내가 아는 한 이것이 전부라네. 이제 속이 시원해지셨는가? 소용 박 씨, 주상전하의 후궁이긴 하나 한갓 아녀자의 마지막 말 한마디에 무어 그리 신경을 쓰시는가? 나는 항상 임금에게 충성된 자이니, 임금께 충성된 상당부원군 대감께도 마찬가지 마음이라네.
정창손 올림
1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신문자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창제 목적이나 재자해 용자례 등 훈민정음 사용법을 적은 책자를 의미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