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잠녀 김옥지가 잠녀 고아라에게
1465년 7월 22일
아, 아라야. 방 감독을 가끔 찾아오는 상차(尙茶) 어른 본 적 있지? 성은 강 씨이고, 함자를 알아냈는데 원종이라지 뭐냐. 호호, 별명이 ‘아씨’라고 하는데 여자 같은 몸매와 고운 목소리를 지녀서 붙여진 거래. 그 분 얼굴을 자세히 본 적이 있니? 얼굴이 희고 뽀얀 것이 정말 예쁜 여자 같고 손가락도 매우 가늘고 섬세하더라. 그 손으로 차를 준비하고 따르는 모습을 상상해 봐, 아! 말을 할 때 내는 콧소리가 실바람처럼 귀를 간질이는 거야. 가까이에서 보니 눈꺼풀이 매우 얇은 것이 꽃잎같이 부드럽게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 있지. 그분이 잠실에 와서 잠녀들과 노자들 주라고 좋은 차까지 방 감독에게 맡겨놓고 가셨지 뭐냐. 어쩜,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그렇게 곱고 섬세하실까.
내가 상차 어른에게 관심이 있냐구? 아니 상차 어른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호호, 상차 어른이 뽕잎을 따고 있는 내 곁으로 다가와서는 “누에가 구멍 난 뽕잎도 먹느냐”고 묻는 거야. 처음에는 무슨 뜻으로 묻는지 당황했는데, 내 표정을 살피는 것이 뽕잎이나 누에에게 관심이 있다기보다 나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지어낸 말인 것 같더라니까. 원유의 기름진 땅 덕분에 뽕잎들의 상태가 매우 좋잖아. 누에들에게 구멍 난 뽕잎까지 먹일 이유가 없다고 하자 고개를 주억거리더라구. 그렇다고 상차어른이 나에게 농을 걸거나 장난을 친 것은 아니고 표정이 진지한 것이, 뭐랄까, 마음까지 움직일 사람 같더란 말이지. 환관들도 여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일까? 아, 이런 말 하면 안 되지, 비밀이야. 다음에 오시면 피부가 그렇게 하얗게 고와지는 비결을 물어보아야겠다. 너는 방비리 어른과 친한 것 같던데, 아니 그냥 눈치가 그래서, 어때?
아, 아라야. 그리고 알고 있니? 소용 박 씨의 ‘백팔 자’에 대해 들었니? 궐 밖 사람들 말로는 한자에 ‘놈 자(者)’라는 것이 있어서, 백팔 자는 백팔 사람을 뜻한다는 거야. 백팔 명이 어쨌냐구? 끔찍한 해석인데, 왕이 백팔 명의 사람을 죽였다는 의미래. 소용 박 씨의 죽음이 백팔 번째라는 말도 있고, 백팔 번째 죽은 자가 나라의 큰 비밀을 지니고 있다고도 하고, 왕이 백팔 명을 죽이면 천지가 뒤집히는 이변이 일어난다는 말도 있어. 소문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왕이 백팔 명을 죽였다는 혹은 죽일 것이라는 소리는 한결같이 똑같아. 정말 끔찍하지 않냐.
백팔이라는 숫자가, 글쎄, 그것이 오묘한 뜻을 지니고 있다지 뭐냐. 불교에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번뇌를 일컬어 백팔이라고 한다잖아. 그 백팔 개의 번뇌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자가 하늘의 뜻을 받을 수 있다는 거야. 얘, 무슨 말인고 하니, 백발번뇌를 하나로 묶어 일심이 되게 하는 자가 왕이 된다는 것이지. 일심이 민심이라는 말도 하더라. 그런데 왕이 된 뒤 하늘의 뜻을 읽어내지 못하고 오만해져 백팔 명 이상의 사람을 죽이게 되면, 하나로 묶여있던 일심이 백발번뇌처럼 사방팔방으로 터져 나오게 된대. 아무리 왕이라지만 백팔 명 이상 죽이면, 하늘도 노하여 왕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는 거야. 전쟁이 나거나 병으로 인해 왕은 죽게 되고 새 왕이 오른다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역모가 일어나 동지는 적으로 사랑은 증오로 변해 왕은 수치스럽고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된대.
그런 소문 때문인지 백성들은 현왕이 즉위한 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몇 명을 죽였는지 저마다 세느라고 야단이 났지, 뭐냐. 계유정난을 기점으로 죽은 사람 수를 세고 있는데, 10월 10일, 쌍십일에 수양대군이 종 임어울운과 양정 등 심복들을 데리고 가서 김종서 장군을 철퇴로 죽인 것을 첫 번째로 삼고 있대. 김종서 장군을 시작으로 죽임을 당한 자들의 이름을 줄줄이 대면서 숫자를 세고 있는데, 숫자가 커질수록 사연들이 보태져서 입에 담기도 힘든 이야기들이 굴러다니고 있다. 여태 알려진 것으로는 안평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과 공모하여 반정을 시도하려기에, 수양대군이 이를 토벌한 것이 계유정난이라는 것이었잖아. 형세는 위급한데 주상 곁에 안평대군의 패거리가 있어서 아뢰지 못한 채, 수양대군이 적괴인 김종서 부자를 먼저 베었고, 나중에 전하께 이를 알리게 된 것이라고들 했잖아.
그런데 아라야, 수양대군께서 적괴의 목을 베고 대궐에 들어와 내시 전균을 시켜 사태를 왕에게 보고하게 한 것까지는 사실이지만, 글쎄 그 다음 이야기는 믿기에는 너무 잔인하고 믿지 않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끔찍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어리신 왕에게 보고하게 한 후, 수양대군은 대궐로 들어오는 길목의 요소요소마다 군사들을 배치하여 엄중 경계토록하고, 왕명으로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 대신들을 불러 들였대. 사태를 의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음, 궐 밖 대신들이 궐 안까지 들어오는 과정에 여러 개의 문을 거치게 되는데, 그들이 그 문들을 지날 때 팔삭둥이 한명회의 살생부에 따라 문과 문 사이에서 이들을 철퇴로 때려 죽였다는 거야. 한명회가 손을 궐 쪽으로 가리키면 무사히 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손으로 목을 쓱 가로 지르는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의 목은 단번에 달아났다는 것이다. 으, 끔찍하다.
김종서 장군과 그의 아들 김승규의 죽음이 1과 2라면, 대궐 문과 문 사이에서 죽어간 황보인, 조극관, 이양의 죽음이 3번과 4번과 5번이라고 한다. 이름을 다 외우진 못하지만 윤 뭐뭐와 조 뭐뭐 등이 6번과 7번과 8번과 9번이었고,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의춘군이 사사된 것이 열 번째와 열한 번째라나 봐. 그 뒤에도 수도 없이 죽여서 몇 십 번째 이름까지 이어지고 있더라구. 아라야, 웬만큼 일리가 있는 이야기야. 안평대군이 모반을 했다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뒤에 어린 왕은 수강궁으로 옮겨갔고, 수양대군이 왕이 되었잖아. 이런저런 과정을 따져보면 수양대군이 왕이 된 과정이 어째 조금 이상하긴 하긴 한 것 같아, 그치?
아라야, 나는 단지 궐 밖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은 대로 전해주는 것뿐이다. 너는 양잠이 끝날 때까지 궐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라야, 다음에 강 상차 어른이 잠실에 오시면 자세히 한번 봐. 차를 많이 마셔서 피부가 그렇게 뽀얀 것일까? 나도 차를 많이 마셔 볼까? 강 상차는 눈도 별만큼 빛이 나는 것 같지 뭐냐. 아라야, 네가 보고 싶다.
너의 동무 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