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신숙주가 하동 부원군 정인지에게
1465년 7월 20일
서둘러 송구하오나, 몽유도원도에 대한 대감의 회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화공 안견은 그 그림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안평대군의 별장이었다고 했습니다. 안평대군 사후 주상전하께서 그 별장을 제게 하사하셨으니, 제가 그림을 보관하고 있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몽유도원도가 정말 별장 어딘가에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가 그것을 찾아 주상전하께 바쳐야 위험한 의심을 사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그림에는 대감과 저의 찬시까지 붙어 있으니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별장 이곳저곳을 뒤져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별장 외에도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기는 하나 그림을 찾으리라는 기대는 별로 없습니다. 혹여 역모의 무리로 몰릴까 안평대군의 글이나 그림을 아예 소각하거나 은밀히 숨겨둔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몽유도원도도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감, 만에 하나 그 그림이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면, 그 그림이 우리에게 가져올 평지풍파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해결책은 몽유도원도를 하루라도 빨리 찾아 불씨를 제거해버리는 일일 것입니다. 승려 만우가 요즘 어느 절에 있는지 아시는지요? 아신다면 승려 만우에게 몽유도원도에 대해 연통은 하셨는지요?
대감, 몽유도원도도 몽유도원도이지만, 아무래도 이것만은 알려드려야 할 것 같기에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오늘 언문청에 들렀는데, 젊은 학사 대여섯 명이 모여 백팔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지라, 또 소용 박 씨 이야기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감, 놀라지 마십시오.
그들은 훈민정음 자음의 글자 하나를 줄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대감도 계시지 않았고, 소인도 그런 어명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중요한 사항이라면… 그런 애송이 학사들이 아니라 신문자 창제의 주역들인 대감이나 소인에게 먼저 하명하셨을 것인데… 지난 술자리 이후부터 주상전하께서는 조금 변하신 듯, 대감과 소인을 배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상전하께 어떤 심중의 변화가 일어나신 것일까요? 화공 안견을 불러 사라져버린 몽유도원도를 찾으시질 않나, 창제 원리도 제대로 모르는 젊은 학사들에게 훈민정음을 맡겨 자음수를 줄이라 명하시지를 않나, 심지어 소용 박 씨 연서의 당사자인 귀성군을 눈에 띄게 아끼시며 우리는 멀리하고 계십니다. 대감, 제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려고 가만히 호흡을 고르고 있었는데, 그때 얼굴에 큰 점이 있는 ‘점박이’ 학사가 하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애초에 훈민정음의 기본 글자는 스물여덟 자가 아니라 스물일곱 자가 아닌가합니다.
학사들은 어이가 없어 모두 점박이 학사를 바라보았고, 즉각적으로 그럴 리가 없다는 반박을 쏟아냈습니다. 점박이 학사는 책거리1에서 자료를 찾아와 우리 앞에 펼쳤습니다. 그것은 훈민정음 창제반대 이유를 장황하게 펼친 최만리 대감의 상소문이었는데,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부분이 분명 “스물일곱 자 언문”이라는 기록이었습니다. 점박이 학사는 당시 집현전의 부제학인 최만리가 스물여덟 자를 스물일곱 자로 잘못 썼을 리가 없으며, 더구나 훈민정음 반대 상소를 올리는 마당에 글자 수를 틀리는 조심성 없는 행동을 했을 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물여덟 자가 아니라 스물일곱 자가 되려면 지금보다 자음 하나가 적은 상태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추리를 했습니다. 최 대감의 상소 중 해당부분을 보내오니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대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점박이 학사가 고개를 돌리며 제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래저래 심기가 불편한 상태에 있었던지라, 주상전하로부터 명을 받은 적이 없으니 의사표현을 하고 싶진 않지만, 세종대왕 훈민정음 어제에 명백히 28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굳이 최만리 상소문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고, 단지 현왕께서 훈민정음 자음을 줄이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니, 학문적인 관점으로 차근차근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자음 와 ㅎ인 모양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두 발음이 혼동되기도 하고 같이 발음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백성들이 사용하기 더 편해지려면 어떤 자음을 줄여야 할지, 신중히 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감, 젊은 학사들은 다시 시끌시끌해졌고, 이런저런 토론과 시비 끝에, 누군가가 훈민정음의 자모 스물여덟 자를 스물일곱 자로 바꾸려는 것은 소용 박 씨의 마지막 유언인 백팔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툭 던졌습니다. 다들 눈과 귀가 번쩍 열리는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했더니, 소용 박 씨의 마지막 유언을 들으신 주상전하께서 갑자기 자모수를 줄이라는 하명을 하셨으니, 분명 백팔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눈이 나빠 손을 더듬거리는 버릇이 있는 더듬이 학사의 주장입니다. 108과 27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108자의 반이 54자이고 54의 반이 27자라는 설명을 했습니다. 바로 반절에 반절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무식한 이들이 어디 있는가.
여태 참고 있던 성질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눌렀습니다. 대감, 본래 언문을 반절이라고 한 것은,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던 유학자들이 언문이 한문의 반에 미치는 정도의 글이라며 낮잡아 일컫던 이름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새파란 학사들이 글자 수를 반으로 줄여서 반절이라고 하다니, 그 깊이가 어찌 그리 얕을까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사고방식이 못마땅해 쳐다보는데, 학사들은 한결같이 이 갑작스런 우연의 일치에 놀라워하며 정말 그 반절의 원리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워낙 불만스런 표정으로 있었던 탓인지, 학사들은 한패거리가 되어 108과 54와 27이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대감, 결국 그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연관이 전혀 없어 보인다고 단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종어제가 108자인 것도 소용 박 씨의 죽음과 관련하여 떠도는 소문 때문에 알았는데, 어찌 이 교묘한 숫자들 사이의 연관성을 금방 단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퇴청 후 집으로 돌아와 생각이 깊어질수록, 대감, 108자와 그 반인 54자와 그 반인 27자가 서로 연관이,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훈민정음 창제에 뜻을 둔 세종임금의 명을 받고 음운 공부를 위해 요동을 수없이 드나들었고, 대감께서도 1448년 훈민정음 반포까지 불철주야 훈민정음 창제 작업에 몰두하시지 않았습니까.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저는 이런 숫자의 조합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혹여 저는 모르고 대감만 알고 계시는 부분이 있는지 감히 여쭙습니다. 그리고 왜 갑자기 주상전하께서 자음을 한 자 줄이라 명하셨는지 짐작되는 부분이 있으신지요. 그 작업도 몇몇 젊은 학사들을 시켜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치 세종대왕 시절 언문청을 두고도 정음청을 만들어 훈민정음과 관련된 ‘뭔가’ 은밀한 작업을 진행하던 때와 그 상황이 비슷합니다. 정말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 또한 몽유도원도처럼 소용 박 씨의 연서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건강 회복하시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신숙주 배상
1 책거리는 책꽂이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