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상선 전균이 어의(御醫) 전순의에게
1465년 7월 8일
전 의관, 오늘 있었던 술자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가? 오늘 연회는 어제 있었던 칠석제의 연장 행사가 아니었네. 칠월 칠석은 임금이 친어하시어 과거시험인 칠석제를 거행하시니, 입궐한 문관들에게 글을 지어서 올리게 하여 상을 내리시는 날이 아닌가. 칠석제 바로 뒷날 있었던 술자리라 그렇게 여길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주상전하께서 종친과 대신을 따로 불러들여 사면령을 발표하시고 주연을 베푸신 자리였다네.
먼저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을 하자면, 어제 칠석제에는 주로 쇠고기를 사용하도록 대령숙수1에게 명하였네. 살코기는 구이로 사용하고, 내장은 삶아 전을 붙이는데 넣거나 적을 만드는데 사용하고, 질긴 부위는 찜과 탕에 사용하도록 말일세. 오늘 술자리에는 쇠고기를 피하고 해산물인 전복이나 해삼을 많이 사용하도록 명하였다네. 찜으로는 해삼찜과 연저증을 올렸고, 만두는 준치만두와 꿩만두를 올렸네. 찬품단자2에 있던 어만두를 빼고 꿩만두를 넣은 경위를 알고 싶다고 했다지?
그럼, 주상전하께서 만두에 대해 언급하신 과정부터 말하겠네. 사정전에는 주상전하와 왕세자와 종친이신 임영대군, 영응대군과, 대신 하동 부원군 정인지, 봉원 부원군 정창손, 영의정 신숙주, 상당 부원군 한명회, 좌의정 구치판, 우의정 황수신, 우찬성 박원형, 좌참찬 최항, 우참찬 윤자운, 지중추원사 김개, 판한성부사 이석형, 지중추원사 양성지, 남양군 홍달손, 공조판서 김수온 등이 있었지. 솔직히 말하면, 그 술자리는 소용 박 씨를 처형한 그 찜찜함을 털어내기 위한 의도적인 술자리였네.
인간을 죽이라는 명령은 오로지 왕만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권한이 아닌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유쾌한 일은 아닌 것이 분명하지. 그래서 그런지 사형이 집행되고 난 후에 곧바로 주연이 베풀어지곤 한다네. 언제부터 그런 의식이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짐작컨대 사람을 죽인 뒤의 불쾌감을 씻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겠나. 사실 환관 최호와 김중호가 박살형을 당하여 맞아 죽었으니 뼛조각, 살 조각, 뒤엉킨 피, 그리고 난장으로 박살이 나버린 인간의 마음까지 주워 담아 처리해야 했던 사형집행인들은 그 후유증으로 잠도 못 이루고, 음식을 토해내면서, 환청에 시달리기까지 한다고 들었네.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주상전하께서도 그 광경을 상세하게 보고 받으실 것이니, 그 느낌이 오죽하시겠나?
그런데 이번 술자리에는 조금 특이한 기류가 흘렀지. 소용 박 씨에게 사형을 내리신 분은 주상전하가 아니라 대신이나 종친들이라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네. 들으셨겠지만, 주상전하께는 오랜 인간의 정이 있으니 너그럽게 형을 내리겠다고 하셨는데, 대신들과 종친들은 가볍게 처리하면 궐 안의 내명부를 다스릴 수 없게 되니 사형을 내림이 마땅하다고 극구 주청을 올렸다네. 주상전하께서는 중전마마의 심중까지 입에 올리시면서 목숨만은 살려주자고 하셨으나, 종친들과 대신들은 그런 뜻을 거두어달라고 거의 막무가내였네. 그들이 그렇게 강력하게 소용 박 씨를 벌주기를 원하는 이유는 조강지처 외에 애첩들을 여러 명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세. 자칫 소용 박 씨를 용서하는 사태가 일어나면 애첩들이 다른 사내를 마음에 두는 일이 흔해질까 미리 두려워하여 이를 막으려는 심사가 아니었겠나. 술자리를 벌이기 직전에 주상전하께서 사면령을 반포하셨다네.
“제왕의 정치는 몸으로부터 집으로, 나라로, 천하에 미치는 것인데 가법(家法)이 바르지 못하면 화가 따르는 법이다. 슬프다! 천하국가를 다스림에는 기강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로, 왕이 목숨을 베고 상주는 것은 한결같이 하늘에 들리는데, 어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죄악은 모두 자신이 부른 것이다. 백성들이 혹여 이 사실을 모르고 다른 말이 있을까 저어하여 대사면령을 윤음하노라. 오늘 이전에 지은 죄는 대역, 살인죄 이외는 모두 사면하여 자유를 주노니, 이제는 죄짓지 말고 생업에만 힘쓰라.”
그러니까 오늘 술자리는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벌어진 일종의 푸닥거리였던 셈이네. 다른 사형 후의 주연 때는 서로 찬반의 의견이 나눠진 경우가 많아 어색한 분위기가 보통이지만, 이번 주연은 대신들과 종친이 하나가 되어 마치 오물이라도 털어낸 듯 시원해하면서 술을 마시고 덩실덩실 춤을 추어 분위기가 고조되었다네. 춤을 추다 비틀거리거나, 남의 발을 밟거나, 심지어 상에 부딪혀 넘어지는 사람이 있었지만, 다들 한결같이 웃음으로 넘겼지. 그런데 그때 마치 술주정을 하듯 임영대군 쪽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있었네. 소용 박 씨와 귀성군의 연서사건 뒷마무리를 위한 자리였으니, 임영대군께서는 얼마나 바늘방석 같았겠나. 그것을 눈치 채신 주상전하께서 정인지 대감을 불러 세우자, 정인지 대감은 방향을 틀어 주상전하 쪽으로 걸어가더니, 술잔을 주상전하께 내밀며 말했네.
“주상전하, 소용 박 씨가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무엇인지 들, 들으셨는지요?”
워낙 큰소리로 말했기에, 술 취한 와중에도 정 대감의 말을 들은 종친들과 대신들이 상당수인 듯했네. 많은 고개가 동시에 그쪽으로 돌아가다시피 했으니까 말일세.
“경은 어찌하여 이 자리에서 그 말을 꺼내는 것인가?”
임금의 높은 언성이 들리자, 술자리는 갑자기 잠잠하다 못해 경직되고 말았네. 영문을 모르는 눈들이 일제히 주상전하 쪽을 향해 있었고, 서로 맞잡고 춤을 추던 손들이 허공에서 슬그머니 내려왔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신숙주 대감이 황급히 달려가 부복하고 말했지.
“술이 취해 잘못 말한 것이고, 다른 뜻은 없는 줄 아옵니다.”
신숙주 대감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정인지 대감도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사죄를 하더구먼. 다행이다 싶었는데, 조아렸던 고개를 다시 쳐들며 말했네.
“죽어가면서 백, 백팔이라고 했다는데, 그것이 무, 무슨 의미인지요?”
정인지 대감은 보통 때는 아주 점잖고 이성적인 분인데, 몸에 술만 들어가면 개처럼 품위를 잃으니… 지난번에는 주상전하께 ‘태상’이라는 망언을 했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지 않은가. 소용 박 씨의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한 술자리였으나 여태 그 사건에 대해 꺼내는 자가 없었는데, 그 인간이 어쩌자고… 종친들과 대신들은 갑자기 귀가 번쩍 열린 듯, ‘백팔’에 대해 무엇인가를 듣길 원하는 눈치였네. 사형을 집형한 의금부와 내금위 갑사들의 입을 막아놓기는 했지만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형당한 자의 마지막 말은 기록에도 남는지라 알려질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지. 주상전하께서는 사태를 이쯤에서 마무리하시고 싶어 하셨네.
“정대감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나에게 술을 따르라. 그리고 이 만두의 속은 무엇이냐?”
사람들은 술이 깨고 취기가 가시는 표정이었네. 정대감은 술을 따랐고, 종친들과 대신들은 연거푸 큰 잔으로 술을 드시는 주상전하를 힐끔 쳐다보곤 했네.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고 대님이 풀어질 정도로 춤을 추던 이들도 자리를 찾아 도로 앉았고, 여태 어쩔 줄 몰라 하던 임영대군의 고개가 아래로 더 수그러져 두 다리 사이로 들어갈 듯 했네. 나는 얼른 주상전하 앞으로 나아가 “만두의 속은 부드러운 꿩고기입니다”라고 말씀 올렸다네. 정대감에 질리신 듯 얼굴이 파래진 주상전하의 얼굴을 뵙기가 민망했네. 좀 더 드셨으면 했지만, 그 만두 하나로 끝이셨다네.
전 의관, 어의(御醫)로써 임금님의 건강을 돌본지 얼마나 되시는가. 세종 임금부터 문종과 어리신 단종 그리고 현왕에 이르기까지 거의 20년 이상 전의감에서 옥체를 돌봐왔고, 그 공로로 1등 좌익원종공신이 됐을 뿐만 아니라. 어의로써 오를 수 있는 최고 자리인 종3품을 넘어 종2품 중추원주공사가 되지 않았나. 나나 전 의관, 우리 두 사람은 문종 임금 시절부터 같은 세월을 산 사람이고, 오로지 주상전하를 위해 온몸을 바쳐 일함으로써 각자 자기 분야에서 최고 자리에 오른 공통점이 있네.
전 의관이 주상전하의 건강에 대해 얼마나 성심성의를 다 하는지 잘 알고 있고, 주상전하의 병세에 이롭지 못한 음식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네. 내가 어만두를 꿩만두로 바꾼 것은, 과거 문종 임금께서 종기로 고통 받으실 때 꿩고기 요리를 많이 올리도록 전의관이 조치했다는 기록을 우연히 본 직후였고, 또한 환관 강원종의 말을 들으니 문종 시대에는 상품의 꿩을 얻기 위해 임영대군 댁까지 드나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 연서사건으로 마음이 무거워진 임영대군께서 주상전하께 사죄의 뜻으로 꿩을 직접 가지고 입궐하셨기에, 마지막 순간에 어만두 대신 꿩만두를 올리기로 결정한 것이네. 자칫 임영대군과 주상전하 사이가 소원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임영대군의 이런 마음을 아셨는지 주상전하께서는 귀성군에게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네. 연서를 받자마자 부자(父子)가 새벽에 달려왔는데 무슨 다른 뜻이 있겠느냐고 도리어 위로까지 하셨으니, 얼마나 관대한 임금이신가. 내가 어만두에서 꿩만두로 바꾼 것에도 아무런 다른 뜻이 없으니, 이해하시기 바라네.
주상전하의 심기가 하루 속히 회복되시기 위해서는 소용 박 씨 사건이 일단락되어야 할 터인데… 마무리를 위한 술자리가 도리어 그 사건을 들쑤셔 놓은 꼴이 되고 말았네. 종친과 대신들이 일제히 108글자에 얽힌 사연을 궁금해 하며 서로 수군거리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네. 어디 그뿐인가. 주상전하께서 내리신 사면령 또한 백성들에게 도리어 화젯거리가 되고 말았네. 애틋한 연서 한 통에 다섯 명의 사람을 죽이고, 도적놈, 폭력범, 강간범 등 죄인이라는 죄인은 다 풀어놓았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으니, 무지한 백성들이 어떻게 성은의 깊이를 알겠는가. 궐 안팎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장안이 108글자의 비밀을 찾는다고 난리가 났다는구먼. 이럴 때 일수록, 우리 마음을 합쳐 주상전하 곁을 지켜 드렸으면 하네. 꿩만두는 잊어버리게나.
그건 그렇고, 108글자의 비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혹시 아는 것이 있으신가?
상선 전균 씀
1 대령숙수는 궁중의 남자 요리사로 주로 연회 음식을 담당하고, 상선은 궁의 음식을 감독한다.
2 요즘의 메뉴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