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제조상궁이 감찰상궁에게
제조상궁이 감찰상궁에게
1465년 7월 8일
자네의 서찰을 받고 생각을 해봤는데, 보명상궁의 정체가 수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나? 그 년을 보면 웬일인지 가슴이 서늘한 것이, 아무래도 저년은 꼬리 여러 개 달린 여우가 틀림없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이야기 좀 들어보게.
소용 박 씨 전각이 비어 있다는 것은 자네도 알 것이네. 소용 박 씨가 3품 소용의 첩지를 받고 중전마마로부터 하사받은 전각이지. 왕을 십 년 이상 모신 곳이기도 하고, 왕자군 아지를 낳은 곳이 아닌가. 소용 박 씨가 처형당한 날부터 소용 박 씨가 거처하는 방은 자물쇠로 잠갔을 뿐 아니라, 아무도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지 않았나. 호기심이나 어떤 목적으로도 그 방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네. 더구나 처형당한 후궁의 방에 당장 누구를 들일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아직 그 전각에는 소용 박 씨의 흔적이 뚜렷했네. 그 전각에서 왕을 기다리고 왕을 기다리다 귀성군을 그리워하고 또 왕을 기다리고 귀성군을 그리워했겠지.
그런데 말이지, 소용 박 씨의 전각을 둘러보고 막 나오려는데, 그 전각 안으로 은밀히 들어서는 보명상궁을 보게 되었네. 그 느려 터지고 초점 없는 눈을 가진 년의 몸이, 매우 잽싸게, 밤에 짐승처럼 눈을 반짝이며 들어서더라니까. 그리고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나? 잠가놓은 소용 박 씨 방을 열쇠로 열고 태연하게 들어가지 않겠나. 그 방을 잠그도록 명한 사람은 바로 나이고, 그것을 실행한 것은 바로 자네가 아닌가. 그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와 자네 밖에 없는데, 어떻게 보명상궁이 마치 제 방 드나들 듯 그 방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더란 말이지. 그래서 당장 그 방으로 뛰어 들어갔지. 흠칫 놀라는 듯 했으나, 여태 반짝이는 눈빛이 줄어들면서 그 느릿하고 갑갑한 태도로 되돌아와서 천천히 말하더란 말이지.
“제조상궁 마마님, 이곳에 어인 일이시옵니까?”
기가 막혀 뚫어지게 쳐다보게 되었네. 보명상궁은 중전의 분부를 받고, 소용 박 씨가 죽고나서 남겨놓은 허물들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정리를 하려고 왔다는 것이었네. 물건들을 그냥 두게 되면 하나둘 분실될 우려도 있고 또 그 물건들이 소문들을 더욱 거세지게 만들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과정에서 왕실의 비밀이나 전하께 욕된 말을 무언중에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소용 박 씨 물건이라면 머리카락 하나도 남기지 말고 챙겨보라고 중전마마께서 엄명을 내리셨다는 것이네. 중전마마의 분부라니 뭐라고 할 것은 없지만, 나와 자네만 가지고 있는 열쇠를 어떻게 보명상궁이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네. 그것을 추궁했더니 보명상궁은 천연덕스럽게 말하지 않겠나.
“친잠례 때 땅에 떨어져 있는 열쇠 하나를 중전마마께서 입수하셨는데, 누가 떨어뜨린 것인지 알아보고 돌려주라고 하셔서, 혹시나 하고 소용마마 자물쇠에 넣어보았더니 맞았습니다. 궐 안에 자물쇠를 채운 곳이 몇 군데 없으니까요. 이 열쇠는 제조상궁 마마님과 감찰상궁 마마님이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 혹시 잃어버리지는 않으셨는지요?”
감찰상궁, 내가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겠나. 나는 열쇠를 가지고 있으니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은 바로 자네가 아닌가. 어쩌다가 열쇠를 잃어버려 이런 수모를 당하게 하는가.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네는 물론 나도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 보명상궁의 그 방자한, 아니 태도와 말이 너무 공손해서 도리어 방자하게 느껴지는 그 년을 참아줄 수밖에 없었네.
나는 보명상궁과 같이 소용 박 씨의 방을 둘러보았네. 보명상궁이 무엇을 찾아내는가 보기 위해 나도 둘러보는 척하면서 일부러 가만히 두었네. 자네와 함께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유서도 특별히 의미를 지닌 유품도 없었잖은가. 병풍, 장롱, 문갑, 부채… 그리고 보명상궁은 벽에 적힌 글자들을 유심히 보았네. 자네도 지난 번 본 벽의 커다란 글자들! 아니, 세종대왕이 만드신 훈민정음의 어제 서문 말일세. 보명상궁은 중얼중얼 그 글을 읽어보는 것이었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읽어보는 것이었네. 훈민정음 언해본1에 있는, 세종어제 훈민정음 말일세.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 이것을 딱하여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안케 하라’고 한 세종대왕의 어제 말일세.
세종어제 훈민정음 언해에는 특별할 것은 없었네. 특별히 첨삭을 하거나 은밀하게 다른 기호를 숨겨놓은 것도 아니었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을 자네도 보지 않았나. 아랫것들을 불러 그것을 지우고 방을 깨끗하게 치울까 하다가 그냥 두었던 것이었네. 그 벽을 한동안 유심히 바라보던 보명상궁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특별한 것은 없다고 중전마마께 보고드릴 생각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이렇게 늦은 밤에도 쉬지 않고 궐을 돌아보고 있던 제조상궁 마마님의 수고도 중전마마께 잘 알리겠다고 덧붙였지. 나를 칭찬하는 것인지 우롱하는 것인지, 하지만 태도와 말이 너무 공손해서 화를 내거나 트집을 잡을 수는 없었네.
그런데 말이지. 감찰상궁. 내가 궐 안의 모든 궁녀와 상궁들을 다스리는 최고 자리인 제조상궁 자리에 앉게 된 것이 절로 된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겠지. 그년의 숨겨진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네. 보명상궁이 어떤 물건이나 어떤 전언을 가지고 중전마마께 간 것은 아니지만, 분명 무언가를 찾았다는 느낌이 있었네. 보명상궁의 태도에는 중전마마가 내린 소임을 제대로 완수한 자의 안도감이 들어있더란 말이지.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분명히 중요한 것을 찾은 것 같은데, 뭔지 궁리 중이네. 도처에 있는 훈민정음 어제에 뭐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혹여 부채? 아니면 나비 모양의 촛대? 아니면…
보명상궁이 중전마마께 뭐라고 말씀을 올렸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년이 불여우짓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너무나 오랫동안 교묘하게 속여 온 것이지. 그년의 느릿느릿한 태도와 어눌한 말은 불여우임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 아닌가 말이지. 중전마마께서 궐 안에서 돌아가는 일을 마치 바늘 하나까지 다 알고 계시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볼 수 있다는 말인가. 혹여 그 여시가 모든 것을 보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 그런데 중전마마를 모시는 다른 상궁들에게 물어보면, 보명상궁이 중전마마를 만나 특별히 다른 말을 전해주거나 그런 적은 없다는 거야. 수수께끼 같은 일이지. 아무래도 그년의 정체를 조금 알아봐야겠는데, 자네가 좀 도와줘야 하겠네.
제조상궁 씀
1 처음 한문으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한문본 훈민정음 또는 해례본 훈민정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이 한문본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것이 훈민정음 언해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