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감찰상궁이 제조상궁에게
감찰상궁이 제조상궁에게
1465년 7월 5일
오늘 친잠례의 감찰 결과를 보고 드립니다.
먼저 중전마마의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상궁의 인도를 받으시며 남쪽 계단을 통해 채상단 위로 올라가 동향으로 서실 때까지의 중전마마의 모습을 보셨는지요? 황금빛 누에 여신이 나타나신 듯,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 검소하신 중전마마께서, 물론 일 년 중에 내외명부 앞에서 가장 아름답고 위엄 있는 모습을 드러낼 때가 친잠례이긴 하지만, 그토록 화려하게 금장을 하신 모습은 왕후로 즉위하던 날 대례복을 입은 이후 처음이셨습니다. 더구나 얼굴에 도는 화사한 기운과 잔잔한 미소를 보셨지요?
중전마마의 아름다움과 위엄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외명부가, 주상전하께서 납시지 않으시고 중전마마 홀로 친잠례를 거행하신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호기심의 고개들을 삐죽삐죽 일으켜 세우는 모양새였습니다. 소용 박 씨 연서 사건으로 다들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보고자 기대했던 내외명부는 밀어(密語)들을 눈짓으로 주고받는 눈치였습니다. 친잠례의 첫 단계인 선잠의, 누조에게 제향하는 절차는 생략되었습니다. 인간들이 누에의 산 생명을 고스란히 희생시켜 실과 번데기를 얻기 때문에 그 많은 넋들을 위로하기 위한 행사 말입니다. 하기사 인간들이 죽어나가는 판국에 누에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중전마마께서는 채상단 위에서 다섯 가지(加持)의 뽕잎을 따셨는데, 기다란 뽕나무 가지를 당기는 갈고리가 붉게 칠한 가래나무로 만들어져 인상적이었습니다. 중전마마께서 뽕잎 따는 것을 마치시고, 후궁 근빈 박 씨와 세자빈이 각각 일곱 가지에서 뽕잎을 땄으며, 그 다음 내외명부가 각각 아홉 가지에서 뽕잎을 땄습니다. 뽕잎 따기가 끝나고 내외명부가 모두 잠실로 이동했을 때입니다. 중전마마께서는 어둡고 축축한 잠실 안으로는 드시지 않으시고, 대신에 후궁 근빈 박 씨(그러고 보니 소용 박 씨도 그렇고 후궁마마 두 분이 모두 박씨입니다)와 세자빈과 내외명부가 잠실로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잠실 안에 들어가 잠녀가 잘게 썬 뽕잎을 건네주면 내명부는 각기 한 잠박1의 누에에다 뽕잎을 뿌려주면 됩니다. 그런데 그 어두컴컴한 잠실 안에서 내외명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처음에는 잠실을 방문한 느낌을 나누는 소리인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소용 박 씨가 처형당하는 날이 오늘이래요”라고 소곤거리는 말이 소첩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습니다. 여인들이 어둠을 빌미삼아 소용 박 씨 연서사건에 대한 정보를 나누느라고 웅성거렸던 모양이었습니다. 그 마지막 말의 울림이 커서 소첩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들은 모양이었습니다.
갑자기 잠실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7월의 축축한 더위와 누에와 뽕잎의 냄새가 뒤섞여 어지러울 정도였는데, 갑자기 잠실 안을 흐르는 긴장감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였습니다. 소용 박 씨가 그 시간에 죽어가고 있다는 참담함과 친잠례 거행 중에 소용 박 씨 뒷담화를 하다가 들켰다는 놀라움으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얼어붙은 듯 서 있었습니다. 서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소첩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갑자기 헷갈렸습니다. 누구 입이냐? 어떤 입이 그 따위 말을 한단 말이냐?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을 지긋 물고 일단 침을 삼켰습니다. 뱉어내면 누구인지 반드시 찾아내야만 하고, 그러려면 잠실 안의 내외명부를 전부 끌어내 한 사람 한 사람 기필코 이실직고 시켜야만 할 것입니다. 입의 범인을 찾아내려다 친잠례의 행사에 차질이 생길 것이 불 보듯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말을 듣지 않은 것으로 돌리기에도 어줍잖은 순간이었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차에, 제조상궁 마마님, 후궁 근빈 박 씨가 주위를 향해 “누에들이 배가 고픈 모양이니 내명부는 서둘러서 뽕잎을 뿌려주도록 하라”라는 말씀을 하지 않겠습니까. 소첩은 깜짝 놀랐습니다. 근빈 박 씨가 그런 상황에 입을 떼다니요?
근빈 박 씨가 누굽니까? 근빈 박 씨는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집현전 학사 박팽년의 누이가 아닙니까. 오라비가 역모죄를 지었으니 자칫 위세를 부리거나 처신을 잘못하면 과거 오라비의 역모죄가 들먹여질 것이고 덕원군과 창원군에게까지 연좌될 수도 있는, 매일 매일이 살얼음판 같은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구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법이 없고 심지어 입을 여시는 것을 본적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내외명부 전체가 바짝 긴장한 그 순간에, 근빈 박 씨가 그렇게 태연하게 내명부에게 지시를 하니 가슴이 섬뜩했습니다. 역모죄를 지어 가문이 망해도 용케 살아남아, 왕의 아들인 덕원군과 창원군까지 낳아 아무런 탈 없이 지키고 있는 비결을 알 것 같았습니다. 소용 박 씨가 주상전하와 중전마마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아지 왕자군을 잃고 자신의 목숨마저 지키지 못한 반면, 근빈 박 씨는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삶이었으나, 두 왕자군을 보란 듯이 키워가고 있으며 후궁으로써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근빈 박 씨의 그 한마디에 내명부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세자빈도 근빈 박 씨의 명에 따라 뽕잎을 누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기 시작했고, 소첩도 뽕잎을 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친잠례를 위해서 세 잠동을 키운 것으로 아는데, 두 잠동 밖에 보이지 않았고 한 잠동은 가려져 있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무슨 일인지 잠녀들을 불러 물어보았겠으나,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혼비백산한 뒤라 다들 서둘러 뽕잎을 주고 잠실을 빠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실에서 나가니, 중전마마와 제조상궁 마마님은 양잠에 필요한 뽕나무 묘목 심는 호미, 곁순 따는 가위, 뽕순 따는 접도, 뽕톱, 전정 뽕가위, 뽕나무 가지 치는 낫, 뽕훑기 등을 둘러 보시고 계셨습니다. 내외명부는 중전마마 앞에 다들 모였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조견의, 중전마마께서 내외명부들의 하례를 받는 순서였기 때문입니다. 잠실 안에 있었던 소용 박 씨의 처형 소식이 진짜건 가짜건 입에 올린 사실을 아시면 중전마마께서 크게 노할 실 것임을 감지한 듯, 내외명부는 이상한 공범 의식에 사로잡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소첩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근빈 박 씨 역시 누에가 배고픈 것 같으니 뽕잎을 주라는 명을 내린 것 밖에 없으니, 사실 누가 뭐랄 사람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조견의를 거행하시면서 중전마마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앞으로 잠실에서는 양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에를 먹이고 남은 뽕잎은 차나 약재료로 사용하게 할 것이며,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는 궐내 주전부리와 약용으로 사용하며, 누에들 중에 병든 것은 그 효능을 잘 살려 약용으로 사용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잠실에 더 많은 여성들이 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선보이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새로운 일자리들이 더 생긴 것을 반기며 궐밖에 놀고 있는 친지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여태 친잠례를 단순한 행사로 무심히 보던 내외명부가 그곳에 진열되어 있던 다양한 도구들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친잠례는 무사히 끝난 것 같았지만, 틈만 나면 소용 박 씨에 대한 뒷이야기를 하는 듯 했습니다. 궐 밖에서 온 관료들의 아내인 외명부는 대부분 조강지처여서 시앗의 연애사건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며 소용 박 씨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반면, 궐 안에 있는 상궁이나 궁녀들인 내명부는 대부분 소용 박 씨의 죽음에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어, 그 입장이 극명하게 갈린 상태였습니다. 소용 박 씨가 죽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측과 소용 박 씨를 죽이는 것은 너무 심하다는 측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와중에 지아비의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죽어가는 중전마마의 입장까지 더해져 정말 묘한 기류가 감돌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잠녀들의 눈은 피곤이나 긴장으로 퉁퉁 부어 있었고, 수고했다고 중전마마께서 상으로 비단을 내리시자 잠녀 고아라는 감동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뚝뚝 흘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조상궁 마마님, 친잠례를 거행하는 중에 마마님께서 보명상궁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시며 자주 쳐다보시던데, 혹여 보명상궁과 불편한 일이 있으셨는지요? 있다면 소첩에게 알려주시어 바로 잡게 해주시옵소서. 소첩 비록 제조상궁 마마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감찰상궁 자리에 앉아 있으나. 소첩의 직무가 내명부의 잘못을 감찰하고 죄를 주는 것이 아니옵니까.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인간이 없으니, 제조상궁 마마님께서 말씀해주시면 그 불편함을 얼마든지 해소해 드리겠습니다.
감찰상궁 배상
1 잠박(蠶箔)이라고도 하며, 이 위에 거적이나 누에자리를 깔고 누에를 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