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상차 강원종이 환관 방비리에게
상차 강원종이 환관 방비리에게
1465년 6월 30일
방비리, 지난 번 서찰에 이뇨작용이 좋은 차를 좀 구해달라고 했어? 꺼꺼꺼. 방비리, ‘그것’이 없다하여 오줌발까지 시원찮아서 쓰겠어. 자네 곁에 지천으로 두고 있는 뽕잎이 이뇨에는 딱이여. 뽕잎차가 만들어지면 다시 한 번 들러 자네에게 건네주도록 하것어.
음, 소용 박 씨 연서사건 알고 있어? 뭐 살아가면서 연서 나부랭이를 쓸 정신이 있는 것을 보면 괜찮은 팔자여. 연서 당사자가 소용 박 씨이고 수신자가 귀성군이라고 들었는데, 이거 어떻게 돌아가나, 가만 우리가 사옹원에서 일할 때 임영대군 댁에 가끔 들렀지, 그때 귀성군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구만. 음, 여자들이 가슴을 설렐만한 귀공자였지만, 좀 소심해 보인다 싶더니만, 여인이 보낸 연서를 들고나가 임금에게 고자질하는 사내라니… 누가 고자인지 모르겄어.
음, 우리가 임영대군 댁에 들른 것은 수라상에 올라가는 꿩을 임영대군이 구해 주셨기 때문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수상한 데가 있는 것 같지 않어? 그 꿩들은 수양대군 댁에서 온 것들이라고 했는데, 기억나? 수양대군이 키우던 꿩들을 임영대군 댁으로 보낸 이유는 사저에 드나들던 승려가 살생을 금했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어. 수양대군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꿩들이 뛰어난 일등품들이어서 수라상에 올리고 싶다고 임영대군이 전해 왔었잖어. 수양대군은 살생을 하지 않으려고 꿩을 임영대군에게 주고, 임영대군은 아주 품질 좋은 꿩을 형님인 문종의 수라상에 올리고 싶어 우리에게 건네주고, 사옹원의 직무상 우리는 꿩요리 하라고 수라간으로 건네주고, 뭐, 참 아름다운 꿩의 순환이라고나 할거여.
당시 사옹원에는 꿩이나 다른 가축류를 구하는 경로가 따로 있는 거였어. 그것들을 구입하는데 드는 전(錢)도 따로 있었지. 임영대군은 수라상에 올라가는 것이고 형님을 위한 것이니, 전은커녕 누가 꿩을 바쳤는지 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구먼. 비굴하리만큼 말이여. 자네와 나는 임영대군의 그런 뜻을 받아들여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구한 꿩 대신에 임영대군이 내놓으신 꿩을 궐 안으로 들여갔어. 산 채로 궐로 들여갔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최상품의 꿩이었지. 그러다보니 사옹원에서 전(錢)으로 구입했던 다른 꿩들은 되팔아야 했고, 그 돈을 우리는 사옹원 상사께 갖다 바쳤는데, 그 상사가 몰래 가로챘는지 어쨌는지 하여간 수상쩍었지. 우리가 눈치 챈 듯하자, 들통이 날 것을 염려한 상사가 방비리 자네를 도리어 함정에 빠뜨려 경복궁에서 내보냈던 것이지. 그 사건과 관련하여, 나야 뭐, 이래저래 애매하게 굴었던 비겁한 놈이네. 입이 열 개라도 무슨 말을 하것어.
방비리, 주상전하께서 소용 박 씨를 사랑하게 된 이야기에도 꿩, 수양대군과 임영대군과 문종 임금 사이의 형제간의 사랑 이야기에도 꿩, 뭐 이런 공통점이 조금 묘하고 지랄 같지 않는가? 혹여 주상전하와 소용 박 씨를 이어준 꿩이 수양대군과 임영대군과 문종 임금을 연결해준 꿩이 아닌지, 이 꿩이 저 꿩이고 저 꿩이 이 꿩이 아닌지, 어째 놈의 목을 확 비틀어보면… 어찌 되었거나, 이것저것 서로 연결될 듯 안 되니, 뭐가 뭔지 잘 모르겠군. 게다가 꿩 덕분에 왕의 후궁이 된 소용 박 씨는 귀성군에게 연서를 보내고, 귀성군은 그 연서를 쥐고 주상전하를 찾아가 폭로하고, 주상전하는 지금 소용 박 씨를 잡아다 국문을 하시고 도무지 관계가 복잡하여, 뭐, 이놈의 나쁜 머리로는 앞뒤가 잘 꿰매지지 않어.
방비리, 그건 그렇고 궐 안에 돌아다니는 연서 내용은 어뗘? 진짜 맞어? 귀성군이 연서를 들고 입궐한 직후에 주상전하께서 서책 『월인석보』를 찾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누군가 (가짜) 연서를 만들면서 월인석보 이야기를 집어넣은 것이 아니것어? 아니면 정말 연서 속에 『월인석보』이야기가 들어 있어 주상전하께서 『월인석보』를 찾으신 것이여? 어느 것이 먼저일까? 소용 박 씨가 자신의 신세를 월인석보 안에 묶인 훈민정음 언해와 같다고 했다니, 다른 사람이 지어내기에는 조금 특이한 비유가 아닌가 말이여. 그렇게 보면 음, 진짜 연서 같으니…
사실 자네가 창덕궁으로 나간 후, 알다시피 나는 정음청에서 일했어. 내가 정음청에서 감독 일을 맡고 있는 시기에 『월인석보』를 묶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뭐 이러다가 나도 어떤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드는 것은 아닌가 모르겄어. 뭐, 환관 두 놈이 죄없이 황천 행을 하는 것을 보니, 나라고 그런 상황에 빠지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요리조리 요지경인 세상을 잘 피해 다니며 연명하는 내 자신이 기특하고 자랑스럽구먼. 그리고 친구, 천 상선어른 밑에서 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참말로 자랑스러워서 하는 말이어.
강원종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