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보명상궁이 정희왕후에게
보명상궁이 정희왕후에게
1465년 6월 28일
중전마마,
이 미천한 것이 중전마마를 모시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일 것입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아기씨가 열한 살 되던 해였습니다. 세종대왕의 왕후이셨던 소헌왕후의 명을 받아, 지밀상궁이 수양대군의 배필을 보기 위해 윤 씨 집안을 찾아왔었습니다. 수양대군이 나랏님이 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때였고, 수양대군의 배필로 여겨지던 분은 아기씨의 언니였습니다. 한데 지밀상궁이 막상 와서 보니 동생이 더 환하고 귀한 상인지라, 궐로 돌아가 동생이 더 적합하다는 의견을 올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언니와 동생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그 후 아기씨는 군부인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왕후가 되셨습니다. 중전마마께서 어느 날 궐로 소첩을 불러들여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궐에서 지밀상궁이 나왔던 날, 동갑내기였던 제가 뒤뜰에 계시던 아씨께 달려와서 궐에서 아주 귀한 분들이 오신 것 같으니 빨리 가셔서 활짝 웃어드리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답니다. 아씨는 제 말을 듣고 호기심에 그분들을 보러가게 되었고, 시키는 대로 환하게 웃었노라 하셨습니다. 그 잠깐의 대면이 마마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셨다며, 황송하옵게도,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타고난 지혜를 지녔다. 앞으로 너는 별로 높지 않은 직책을 갖고 평생 내 곁에서 살아가겠지만, 궐 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만사를 은밀히 둘러보고 그 정황을 알려줄 것이며, 과거 윤 씨 집에서 했던 것처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 나가서 환하게 웃어야 하는지 알려 달라. 겉으로는 보잘 것 없는 보명상궁1이나 너는 국모의 비밀책사가 될 것이다.”
세월이 무상하여, 입궐해서 중전마마를 모신 지 십년이 더 지났습니다. 중전마마, 용서하시옵소서. 최근 중전마마께서 상심하신 듯하여 부지불식간에 옛날이야기를 꺼내고 말았습니다. 중전마마, 내금위에 심어놓은 갑사를 통해 주상전하께서 소용 박 씨를 친국한 내용을 알아냈습니다. 정리하면 아래 내용과 같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덕중이라 합니다.”
“귀성군에게 서찰을 보낸 자의 이름이 덕중이라 되어 있다. 네가 맞느냐?”
“전하, 기억하시는지요? 덕중은 궐 밖에서 사용하던 제 이름이옵니다. 궐 밖 수양대군의 사저에는 두 명의 덕중이 있었습니다. 제 이름도 분명 덕중이지만, 사저를 마음대로 드나들던 승려의 이름도 덕중이었습니다. 소첩도 귀성군에게 서찰을 보냈지만, 그 승려도 귀성군에게 서찰을 보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전마마, 혹여 수양대군의 사저, 즉 지금의 잠저를 드나들던 승려 덕중을 기억하시는지요? 소첩은 덕중이라는 승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나, 그 이름을 들으신 주상전하는 매우 놀라는 기색을 보이셨다 합니다. 주상전하께서는 승려 덕중에 대한 언급은 피하시면서, 다시 하문하셨다고 합니다.
“말장난은 그만 두어라. 귀성군에게 쓴 서찰이 이것이 처음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 번 썼지만 보내지 않았을 뿐이옵니다.”
“이것이 정녕 연서가 맞느냐?”
중전마마, 임영대군과 귀성군이 새벽에 득달같이 달려와 연애편지라고 내민 서찰이고, 게다가 주상전하께서 서찰 내용을 분명 읽어 확인하셨는데도, 정녕 연서냐고 소용 박 씨에게 세 번이나 확인하셨다고 합니다. 주상전하의 의중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으나 소용 박 씨가 문안서찰이라고 답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이셨거나, 아니면 다른 저의를 캐려하신 것 같습니다.
“누구와 공모했느냐?”
“연서에 공모가 어디 있습니까. 공모는 모반을 꾸밀 때나 하는 일이 아닙니까?”
중전마마, 주상전하께서 하문하신 내용이 조금 이상해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은 마치 역적을 문초할 때 쓰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까?
“죽고 싶으냐?”
“죽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정녕 죽고 싶으냐?”
“주상전하, 알고 계시는지요? 주상전하께서 형제의 가족이나 측근을 죽일 때마다, 그 응보처럼 전하의 가족이나 측근이 죽어나갔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소첩을 죽이시면 응보처럼 또 다른 한 사람이 죽어나가게 될 것입니다. 소첩이 전하의 측근이면 형제의 측근이 죽어나갈 것이고, 소첩이 형제의 측근이면 전하의 측근이 죽어나갈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무슨 소리냐?”
“잊으셨습니까. 문종 임금의 아들인 단종이 가신 해에 전하의 아드님이신 의경세자께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궐에 들어와 세자가 되신지 이 년만이었습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죽은 현덕왕후가 노하여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고 저주를 내렸고, 이 때문에 의경세자가 한창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에 떠났다고 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문종 임금의 부마이자 경혜공주(敬惠公主)의 부군(夫君)이신 정종(鄭悰)을 반역죄로 처형하신 해에, 전하의 며느님이신 세자빈 한 씨가 죽지 않았습니까. 첫 번째 세자빈은 한명회 어른의 딸로 당시 열여섯 밖에 되지 않았고, 원손인 인성대군 낳은 지 육 일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세자빈이 죽은 것은 정종을 죽인 뒤에 일어난 일이어서 이것도 응보로 일어난 것이라고들 했습니다.”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어디 감히 과인 앞에서 쏟아놓느냐!”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어찌 전하만 모르신다 하십니까?”
중전마마, 주상전하와 소용 박 씨가 서로 칼 같은 싸움을 하는 듯이 보였다고 합니다. 소첩도 국문 과정을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주상전하께서는 또 누가 죽고 누가 죽었느냐고 다 말해보라고 하셨답니다. 그러자, 놀라지 마십시오. 소용 박 씨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지 왕자군이 죽은 해에 세자의 아들 어린 인성대군이 죽어간 것을 정녕 모르신다 하실 것이옵니까?”
“네가 아지를 잃고 정신이 나갔구나. 그래, 안타깝게도 인성대군이나 아지 왕자군이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떴다. 하지만 원손인 인성대군이나 아지 왕자군이나 둘 다 내가 지극히 아꼈던 내 혈족이니라.”
“과연 그러하오리까?”
순간 주상전하의 눈빛이 칼같이 날카로워지셨다고 합니다. 무슨 생각으로 소용 박 씨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 말뜻 속에는 여러 의미가 들어 있는 듯합니다.
“네 말이 정녕 맞는다면 너는 내 측근이니, 내가 너를 죽인다면 그 응보로 내 형제의 가족이나 측근 한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제일 먼저 누가 되리라고 생각하느냐?”
순간 소용 박 씨는 말이 없었다 하옵니다. 소용 박 씨의 논리대로, 주상전하께서 소용 박 씨를 죽이면 그 응보로 누가 죽게 될까요? 정말 그렇다면 연서와 관련된 (형제의 혈족인) 귀성군이 같이 죽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겠습니까. 그 사실을 감지했는지 소용 박 씨는 고개를 수그리고 있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합니다.
“소첩이 주상전하의 측근이 아니라, 형제의 측근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 분은 서로 수수께끼를 푸는 듯 했다 합니다. 중전마마, 소첩은 이 수수께끼의 해답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전마마께서는 언제 사람들 앞에 나가 활짝 웃어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소첩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중전마마, 이런 말씀드리는 것이 황송하오나,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어렵고 난감한 상황일수록 중전마마의 위상과 품위로 주변을 밝히시옵소서. 이번 연서 사건은 거품처럼 금방 사라져버리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금장을 하시고, 누조처럼, 우아하게 뽕잎을 따시고 누에를 치시는 친잠례를 거행하시옵소서.
친잠례를 치르시면서 활짝 웃으시는 동시에,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일 한 가지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외명부의 눈과 귀가 모두 친잠례에 쏠려 있는 시각에, 소용 박 씨를 은밀하게 처리하시는 것입니다. 중전마마께서 소용 박 씨를 아끼시어 하루라도 더 목숨을 연장시켜 주시고자 하는 심정은 백 번 이해하옵니다. 허나, 소용 박 씨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가 죽는 것은 기정사실이오니, 궐 안의 눈이 모두 중전마마에게 쏠려 있는 시간에, 소용 박 씨를 처단하시면 어떨까 하옵니다. 주상전하께서도 소용 박 씨를 아끼시니 결정이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감히 소첩이 의견을 올린다면, 주상전하와 중전마마께서는 소용 박 씨를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시고, 종친들과 대신들이 소용 박 씨를 죽이기를 간구하는 형식으로 사형에 이르게 하면 어떨까 하옵니다. 그리 하시면, 말 많은 인간들이 내뱉는 수치와 남세스러움을 주상전하와 중전마마의 위상과 사랑으로 뒤집어놓을 수 있게 될 것이옵니다.
중전마마, 궐내 돌아다니는 소용 박 씨의 연서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 정확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주상전하와 임영대군과 귀성군뿐인데, 어떤 분이 연서의 내용을 공개하셨겠습니까. 주상전하께서는 중전마마께도 연서를 보여주시지 않으셨고, 국문에서조차 공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소첩의 미천한 생각으로는, 누군가가 진짜 연서의 일부분과 상상력을 짜깁기해서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짜 연서의 일부분이란 임영대군과 귀성군이 서로 이야기한 내용을 아랫것들이 주워들었거나 종친들에게 그 사연을 알리는 과정에 흘러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건 진짜이건 연서의 내용상으로 보면, 소용 박 씨가 귀성군을 혼자 좋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보명상궁 배상
1 왕후의 곁에서 일정을 챙기고 필요한 서류 등을 작성하는 소위 비서와 같은 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