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궐 내 돌아다니는 소용 박 씨의 (가짜) 연서 필사본
비가 내리는 궐 안에서 귀성군을 생각하니,
몸속으로 슬픔과 추억이 빗물처럼 고여 듭니다.
그때 난 열 세 살 소녀였습니다.
세상에 대한 수줍음으로 어찌 할 바 몰라, 뒤뜰 모과나무 밑의 살랑거리는 바람에 혼자 앉아 있기도 하고, 모과나무의 큰 둥지를 두 팔을 뻗어 안고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예민한 나이였습니다. 몸의 변화도 그랬고, 마음의 변화도 그랬습니다. 왠지 공중에 붕붕 떠오를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더 소심해져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둥지를 기어 다니던 큰 개미가 내 저고리 섶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가슴 한 쪽이 따끔거리더니 금방 가려워져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가슴께를 부여 쥐고 울음을 참고 있었는데, 마침 ‘덕중의 정원’을 찾은 귀성군께서 달려오셔서 옷섶으로 기어 나오는 개미를 급하게 잡아 멀리 던져 주셨습니다.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수양대군의 사저에는 장정들의 모임이 잦았는데, 장수에게 활과 칼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 오시는 귀성군을 먼발치에서 보곤 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늠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할 때여서, 뵐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당시 귀성군도 언뜻언뜻 저를 알아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귀성군과 수양대군께서 뒤뜰에 같이 나타나셨지요.
수양대군과 함께 뒤뜰에 산보하러 나오셨다가, 저와 맞부딪힌 까닭입니다. 귀성군은 얼굴이 빨개져 내 시선을 피했고, 수양대군은 나를 보고 얼굴을 붉히는 귀성군을 보며 껄껄 크게 웃음을 날리시지 않으셨습니까. 귀성군의 표정을 살핀 후 수양대군은 저를 유심히 바라보시는 듯 했습니다. 내심 당황했지만, 수양대군과 귀성군 앞으로 따고 있던 앵두 바구니를 내밀었습니다. 수양대군은 바구니에서 앵두를 하나 집었으나, 귀성군은 빨개진 얼굴로 조금 떨고 있는 듯 했습니다. 수양대군은 앵두를 입게 가져가시며, 내 이름을 물었습니다.
덕중이라 부릅니다.
귀성군, 그렇게 나는 귀성군의 숙모가 되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궐 안은 너무나 고독합니다. 훈민정음은 유교에서 태어나 불교에 묶인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몸이 『월인석보』 속의 훈민정음 언해 같은 신세가 아닙니까? 귀성군이 과거에 급제하여 곧 입궐한다고 들었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소원을 물으시면 아지 왕자군을 잃은 숙모를 위로하고 싶으니 뵙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시옵소서. 귀성군! 귀성군에게 진작 말해야 하는 것을, 이 가슴 속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하면 죽어서도 후회하게 될 것 같사옵니다.
그리운 덕중이가
궐 내 돌아다니는 소용 박 씨의 (가짜) 연서 필사본
비가 내리는 궐 안에서 귀성군을 생각하니,
몸속으로 슬픔과 추억이 빗물처럼 고여 듭니다.
그때 난 열 세 살 소녀였습니다.
세상에 대한 수줍음으로 어찌 할 바 몰라, 뒤뜰 모과나무 밑의 살랑거리는 바람에 혼자 앉아 있기도 하고, 모과나무의 큰 둥지를 두 팔을 뻗어 안고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예민한 나이였습니다. 몸의 변화도 그랬고, 마음의 변화도 그랬습니다. 왠지 공중에 붕붕 떠오를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더 소심해져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둥지를 기어 다니던 큰 개미가 내 저고리 섶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가슴 한 쪽이 따끔거리더니 금방 가려워져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가슴께를 부여 쥐고 울음을 참고 있었는데, 마침 ‘덕중의 정원’을 찾은 귀성군께서 달려오셔서 옷섶으로 기어 나오는 개미를 급하게 잡아 멀리 던져 주셨습니다.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수양대군의 사저에는 장정들의 모임이 잦았는데, 장수에게 활과 칼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 오시는 귀성군을 먼발치에서 보곤 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늠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할 때여서, 뵐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당시 귀성군도 언뜻언뜻 저를 알아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귀성군과 수양대군께서 뒤뜰에 같이 나타나셨지요.
수양대군과 함께 뒤뜰에 산보하러 나오셨다가, 저와 맞부딪힌 까닭입니다. 귀성군은 얼굴이 빨개져 내 시선을 피했고, 수양대군은 나를 보고 얼굴을 붉히는 귀성군을 보며 껄껄 크게 웃음을 날리시지 않으셨습니까. 귀성군의 표정을 살핀 후 수양대군은 저를 유심히 바라보시는 듯 했습니다. 내심 당황했지만, 수양대군과 귀성군 앞으로 따고 있던 앵두 바구니를 내밀었습니다. 수양대군은 바구니에서 앵두를 하나 집었으나, 귀성군은 빨개진 얼굴로 조금 떨고 있는 듯 했습니다. 수양대군은 앵두를 입게 가져가시며, 내 이름을 물었습니다.
덕중이라 부릅니다.
귀성군, 그렇게 나는 귀성군의 숙모가 되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궐 안은 너무나 고독합니다. 훈민정음은 유교에서 태어나 불교에 묶인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몸이 『월인석보』 속의 훈민정음 언해 같은 신세가 아닙니까? 귀성군이 과거에 급제하여 곧 입궐한다고 들었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소원을 물으시면 아지 왕자군을 잃은 숙모를 위로하고 싶으니 뵙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시옵소서. 귀성군! 귀성군에게 진작 말해야 하는 것을, 이 가슴 속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하면 죽어서도 후회하게 될 것 같사옵니다.
그리운 덕중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