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감찰상궁이 제조상궁에게
1465년 6월 27일
마마님! 말씀하신 소용 박 씨 연서의 필사본을 손에 넣었습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말이 연서이지 진짜 서찰 내용일 리가 없습니다. 이런저런 억측과 소문을 토대로 누군가가 쓴 가짜연서임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소첩이 엄하게 단속하고 또 단속해도 계속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입니다. 궐내 궁녀라면 누구나 소용 박 씨의 연서를 적어도 한통씩은 필사해서 가지고 있다 하고, 심지어 궐 밖으로 빠져 나간 연서 필사본들이 빠른 속도로 장안에 퍼져나가고 있다 하니, 장차 이 일이 어떻게 더 번져나갈지 막막합니다. 몇 년 전 여장(女裝) 사내인 사방지1가 장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이후의 최대 사건입니다.
마마님! 덕중, 아니 소용 박 씨가 수양대군의 사저에 있을 때부터 귀성군의 정인(情人)이었다는 소문이 은밀히 돌고 있습니다. 주상전하께서 그 사실을 모르시고 소용 박 씨를 여자로 취했다는 것이지요. 왕이 조카에게 속고 여인에게도 속았다고 쑥덕쑥덕 궐 안이 난리가 났습니다. 소용 박 씨 연서를 읽으려고 미처 언문을 배우지 못한 궁녀들이 훈민정음 서책까지 찾고 있다고 합니다. 소용 박 씨 전각을 명소 찾듯 몰래 찾아가 구경을 하고 돌아오곤 한답니다.
마마님! 아무리 감찰상궁이라 하나 이런 입소문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임금님이 보기 좋게 당했다고 재미있어하고 심지어 통쾌해한다고 하니, 답답한 궐 속에서 그런 재미를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궐 안 사람들은 주상전하에 대해서 계유정난의 두려움과 함께 감히 쳐다볼 수 없는 강압적인 힘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조카를 내쫓고 그것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한 왕이라는 의심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가, 도리어 다른 조카에게 여자를 빼앗긴 왕을 보자 응어리졌던 마음들이 보상을 받은 듯 조금씩 풀어지는 모양새입니다. 주상전하와 소용 박 씨의 이야기가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왕의 사랑을 받으려면 꿩을 키우라’고 누군가 빈정대고, ‘여자를 지키려면 조카를 조심하라’고 누군가 화답함으로써 다 같이 웃고 즐긴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소용 박 씨와 귀성군의 관계가 소문처럼 수양대군의 사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면, 십 수 년 이상 된 사이가 아닙니까. 미천한 소첩의 생각으로는 사저 시절부터의 정인관계는 와전되고 과장된 이야기일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귀성군이 이제 와서 목숨 걸고 그것을 밝힐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소첩은 소용 박 씨가 궐 안에서 외로워서 시조카를 유혹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실 원손인 인성대군을 잃으신 후부터 주상전하께서는 소용 박 씨를 소홀히 하셨고, 소용 박 씨 역시 아지 왕자군을 잃은 후부터 주상전하를 전처럼 애틋하게 섬기지 않으셨으니, 두 분 사이가 최근 조금 멀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에 소용 박 씨가 외로워서 시조카를 유혹한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아, 잠깐, 누가 왔는데, 다시 쓰겠습니다.
제조상궁 마마님, 방금, 두 나인을 교살형에 처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소용 박씨도 국문장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마마님, 결국 일이 이렇게 풀어지고 맙니다. 내용도 모르는 서찰을 전한 죄로 나인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나인들은 국문장에서 문안편지인 줄 알고 전했다고 토설했다 합니다. 거짓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소용 박 씨가 궐 밖의 남자에게 서찰을 쓴 것이 아니라, 숙모가 조카에게 쓴 문안서찰을 전한 것뿐입니다. 물론 직접 전했으면 환관들까지 끌어들이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소용 박 씨의 서찰을 환관에게 전한 죄밖에 없지 않습니까. 상전의 명을 받아 서찰을 전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내명부 전체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상전이 시키는 일을 어느 나인이 마음 놓고 제대로 하려 들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소용 박 씨가 국문장에 끌려갔다고 했으니,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난 것입니다. 물론 주상전하께서 금방 어떤 결정을 내리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워낙 참담한 사건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실 것이옵니다. 미천한 출신이 주상전하의 성은을 입어 정3품 소용 첩지까지 받더니, 쯧쯧, 꿈에서도 이루어지기 힘든 귀한 팔자려니 했는데, 아닙니까. 결국에는 그 은혜를 모르고 귀성군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성은을 배반했습니다.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환관 최호와 김중호는 박살형에 처하고 나인 운비와 송영은 교살형에 처한다고 했다니, 이미 네 사람의 목숨이 떨어져 나간 셈입니다. 앞으로 소용 박 씨의 목숨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궁녀가 궐 밖의 남자와 간통하면 궁녀와 그 남자의 목을 즉시 베게 되어 있습니다. 임신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출산 후 백 일을 기다렸다가, 즉시 참형에 처합니다. 방자나 무수리는 장형을 당하거나 강제 노역을 하면 끝나지만, 궁녀나 상궁은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형수들은 집행 시까지 기다리다 운 좋게 사면으로 풀려나기도 하지만, 간통한 궁녀는 모반대역과 똑같이 곧바로 목을 벱니다. 일반 나인의 간통도 모반대역에 준하는 중범죄로 여기며 절대 살려두지 않는데, 하물며 후궁이 궐 밖 종친에게 연서를 보냈으니 살려둘 리 있겠습니까? 더구나 소용 박 씨는 주상전하의 후궁이니, 귀성군과는 근친상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감찰부 나인들이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소식이 있으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찰상궁 배상
붙임 말: 궐 내 돌아다니는 소용 박 씨의 연서 필사본 한통을 첨부합니다.
1 세조 8년 계집애 같은 외모와 치장으로 여인으로 자라난 사방지라는 사내가 많은 여승들과 부인들을 희롱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