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뭐 때문인데? 영규가 묻자 그는 아주 귀찮아하며 짧게 말했다.
“나와 진이가 아닌 모든 것들. 형을 포함하여.”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려다가 휙, 돌아서서 영규의 얼굴에 제 얼굴을 들이대고 소리치듯, 그러나 속삭였다.
“우린 다 괴물이라구, 형. 우리가 원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지만. 형, 나에게서 괴물 본 적 없어?”
성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을 때 영규가 생각한 것은 자신이 재판이고 식구고 다 내던지고 술병 끼고 여관방 찾으러 나서는 순간이었다. 목구멍까지 똥물이 차오르는 듯 여겨질 때 구역질을 이겨내는 단 하나의 방법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술을 퍼마시는 일이었다. 그는 성준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한 잔 더 먹자, 성준아. 괴물들끼리 한 잔 더 해야지. 술을 이기지 못해 금강제화 건물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정우는 그 말을 듣자 버럭 소리쳤다. 제발 집에 좀 가자, 이 괴물들아.
강당 뒤쪽에 서 있던 교도관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2369번! 스크린 바로 앞 벤치에서 수감자 한 사람이 일어서 대답했다. 네. 교도관은 지시했다. 이리 와. 2369번은 강당에 빼곡히 들어앉은 수감자들 사이를 비집고 교도관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 앉아. 교도관은 강당 제일 뒤에 놓인 벤치를 가리켰다. 2369번은 영문을 모르는 채 거기 앉았다. 그 벤치는 비어 있었고, 그녀가 앉자 교도관이 그 옆에 버텨 섰다.
타르르르, 소리와 함께 영사기가 돌아가고, 스크린에 빛이 떠오르고 영상이 떠오르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저것은 거울이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 영화감독이 배우들과 함께 만든 거울, 그는 그 거울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미인들, 탈출을 모의하다’라는 제목이 흘러갔다. 아무런 생각 없이 스크린을 지켜보던 2369번 수감자는 스크린에 떠오르는 글자들 가운데 홍정우라는 이름을 발견하자 화들짝 놀랐다. 이건, 이건··· 내가 출연한 영화인가? 그녀가 출연한 영화의 제목은 ‘우물 속으로’였다. 그 영화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은 이미 터질 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타이틀이 지나가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그녀는 곧 알게 되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였다. 홍 감독이 보낸 시나리오가 고스란히 생각나고, 인천의 촬영 현장이 생각났다. 제목이 바뀐 것뿐이었다. 어쩌다 이 영화가 여기에서 상영이 되는 것인지 그녀는 정말 궁금했다.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교도관은 어째서 갑자기 그녀를 불러내 이 뒷자리에 앉힌 것일까? 혹시 여기에 홍정우가 와 있는 것은···? 설마······. 아닐 것이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숨고 싶었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수감자는 임의로 자리를 옮겨 다닐 수 없는 존재였다. 별도의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그녀의 감옥은 바로 그 벤치였다.
그녀가 감옥살이를 하는 사이 영화가 완성되어 상영되고··· 마침내 교도소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관객은 많이 들었을까. 홍 감독과 영규, 그리고 성준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성준의 시놉시스를 놓고 토론을 벌이던 날들이 다시 한 번 그리웠다. 한때 그런 일들이 그녀의 것이 되리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백 년 전의 일이었다.
누군가가 벤치 저 편에 와 앉았다. 서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온몸의 지각을 다 동원하여 살펴보았다. 가슴이 벌컥거리기 시작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감자인 것 같지 않았다. 남자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영화 관계자일 것이다. 혹시 홍정우? 만일 그라면···. 그가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워 서진은 숨소리마저 죽이려 애썼다. 누구인지 궁금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슬며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서진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스크린으로 향하는 빛무리의 희미한 난반사 속에서도 그녀는 알아보았다. 온몸의 혈관이 우르르 경련했다. 영화가 사라졌다. 어둠도 사라졌다. 강당이 사라졌다. 빛도 거울도 사라졌다. 홍정우라는 이름을 본 순간 그녀가 가장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 가장 기대했던 일이 벌어졌다. 성준이었다. 그가 서진을 바로 한 발짝 옆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꾸물꾸물, 성준의 손이 벤치를 건너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주저 없이 서진은 그 손을 마주잡았다. 울컥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은 손을 마주잡은 채 영화를 보았다. 마침내 스크린에 서진이 나타났다. 그녀는 검소한 푸른 원피스에 연두색 스웨터를 걸치고 소박한 단화를 신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낯선 것에 성준은 잠깐 놀랐다. 일 년이 넘는 기간 같이 지내면서도 본 적이 없는 서진의 새로운 얼굴을 카메라가 잡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깨끗하고 싱싱했다. 구김살 없는 얼굴이 소년 같았다. 그녀는 비가 흩날리는 인천 차이나타운의 골목을 우산을 받고 걸어 올라가며 물었다. 난 어때? 나라 해서 꼭 이렇게 살고 싶은 건 줄 알아? 성준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서진이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성준의 크고 뜨거운 손 안에서 버터처럼 녹아내릴 듯했다. 그렇게 사라져버려도 좋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마주잡은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었다. 오직 그들의 체온이, 더불어 두 사람만이 알아듣는 얘기가 오갔다.
에필로그
괴물과 싸우는 법 / 시놉시스-3
새벽에 서진은 교도소의 커다란 철문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몸은 더 작고 더 가늘어져 한 포기 풀 같았다. 준성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은 순간 사방에서 용들이 광포하게 울부짖었다. 교도소 감시탑의 탐색등이 어둠을 조각내는 가운데 한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의 용이 분노에 차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준성은 놀라 얼른 바위틈에 엎드렸다. 피할 곳을 찾아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둠, 바람, 그리고 추위, 파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서진은 피할 생각도 않고 여전히 우뚝 선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그녀는 태연했다. 공습처럼 어둠 속에서 용들이 울부짖고 있는데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머뭇머뭇 일어서자 그녀는 말했다.
“이미 죽었어.”
누가?
“용. 용들.”
준성은 동시에 두 질문을 해야 했다. 저 용들이 울부짖는 소리는 무엇인가? 용이 있기는 했다는 것인가?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용 같은 건 없었을 뿐 아니라 이젠 죽어버렸어. 무서워할 것 없어.”
추위가 몸을 얼어 붙이는 것 같았고, 바람은 사방에서 밀려와 거칠게 그들을 떠밀었다. 서진의 길지도 않은 머리칼이 민들레 꽃씨처럼 펼쳐져 곧 바람 속으로 날아오를 듯했다.
준성은 생각이 복잡해졌다. 없었던 것이 죽을 수 있는가? 이 나라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죽은 용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있었단 말인가? 서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사는 스크린 위에는 존재했던 거지.”
스크린이라니? 스크린에 온갖 빛과 그림자가 출렁이듯, 살고 죽고 싸우고 빼앗고 죽이듯, 그러나 그것들이 스크린에 실재하는 것은 아니듯, 용은 다만 스크린에 존재할 뿐이었다. 무슨 스크린?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자들의 스크린. 그것은 마치 거울 앞을 떠난 사람을 여전히 비추고 있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 앞은 비어 있는데 거울 속에는 아직 용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어쩌면 용을 두려워하건 두려워하지 않건, 용이 살아 있다고 믿는 자들이야말로 용이었다.
그들은 교도소 앞의 캄캄한 어둠 속을 한참 동안이나 더듬더듬 걸어 내려갔다. 모든 방향에서 찬바람이 치달아와 한 걸음 옮기기마저 힘들고 조심스러웠다. 어둠이 바람에 찢겨 나갈 듯했고 먼 하늘에 초롱초롱한 별빛마저 찢어져 흩어지는 듯했으며··· 용의 울부짖음은 차츰 멀고 희미해졌다.
그러나 준성은 그 소리에 다시 오금이 저리는 듯했다. 정말 용은 없는가? 그가 다시 물었다. 서진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에 휩쓸렸다. 있어. 준성은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있어? 서진은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알잖아. 두 사람의 입술이 오랜만에 만났다.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를 준성은 귀가 아니라 입술을 통하여 들었다.
“거울이 있는 곳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