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오서진, 징역 일 년형에 처한다. 판사가 선언했을 때 서진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온몸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전락, 오래전부터 그녀가 예감해온 바로 그것, 철저하고 최종적인 전락이었다. 오태수가 술 구덩이에 떨어졌듯 그녀는 이 구덩이에 떨어졌다. 누군가가 구덩이 위에 뚜껑을 닫고 꽝꽝 못질을 해버렸다. 일 년 후 출감이라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녀에게는 일 년 후의 출감이나 백 년 후의 출감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김영규 변호사가 면회를 왔으나 서진은 나가지 않았고, 바로 몇 시간 뒤 이번에는 성준이 면회를 신청했으나 그녀는 나가지 않았다. 서진은 그가, 그들이, 성준을 통해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잊어주기를 원했다. 차라리 잊혀지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저 교도소 밖 면회장 근처를 영규와 함께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을 성준을 생각하면 말라붙은 목구멍을 비집고 통곡이 밀려나올 것 같았다.
다음 목요일, 성준은 면회를 오지 않았다. 서진은 하루 종일 기다렸다. 시간은 유난히 더디 갔다. 오후가 지나고 작업이 끝나고 입방(入房)이 시작되었으나 그는 오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포기했다. 눈물이 찔끔 났으나 그녀는 참았다. 자신이 많이 무감각해졌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산다는 짓은, 이놈의 세상은 앞으로 얼마든지 더 가혹해질 것이고, 그녀는 얼마든지 더 무감각해져야 할 것이다.
며칠 뒤, 성준의 편지가 왔다. 화들짝, 반가워지는 심사를 서진은 스스로 단속하고 나무랐다. 교도관이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 한동안 들고 서 있다가, 봉함을 뜯으려다가··· 그녀는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읽지 않았다.
읽으면… 그의 따뜻한 말이 들려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리고 말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봉투를 뜯을 수 없었다. 편지를 버릴 수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성준은 냉정하고 무자비하게 결별을 선언하는 편지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편지를 읽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고, 편지를 읽기가 더 두려워졌다. 서진은 편지를 소중히 주머니에 간직하고 작업장에 나가고 베개 밑에 간직하고 잤다. 답장은 쓰지 않았다. 일단 그에게 말을 하기 시작하면 지금껏 견지해온 의지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일주일 뒤 또 그의 편지가 왔다. 그녀는 읽지 않았다. 먼저 온 편지와 함께 접어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고 베개 밑에 간직하고 잤다. 답장을 쓸 수 없었다. 편지를 읽지 않았는데 무슨 답장을 쓰랴. 편지는 세 통이 되고 네 통이 되고 다섯 통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번, 때로는 두 번, 편지는 어김없이 날아들었다. 날이 갈수록 두터워지는 편지묶음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가 불편해졌다. 작업이 끝나 감방으로 돌아올 때면 교도관들이 몸수색을 했는데, 그때마다 편지를 꺼내 왜 그것을 늘 가지고 다니는지를 추궁했고, 서진은 대답이 궁했다. 편지묶음이 콘크리트 바닥에 동댕이쳐질 때마다 성준이, 더불어 그녀가 모욕당하는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서진은 편지를 감방 안에, 헝겊으로 만든 보따리에 넣어두고 나서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되돌아서서 편지를 작업복 주머니에 쑤셔 넣고서야 감방을 나설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처음 온 편지 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 편지들은 영치시켰다. 출감 때에나 그 편지들을 되찾게 될 것이다. 백 년쯤이 지나 출감하여, 참을 수 없을 만큼 그가 그리워지면 하나하나 꺼내어 천천히 읽어보리라. 한때 눈길이 담백하고 고요한 남자가 나를 지극히 사랑한 적이 있었지, 하고 백 년 전의 일을 회상할 것이다. 그런 기억만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까.
나무 한 그루 없는 청주여자교도소 운동장에는 낙엽 한 장 떨어지지 않았으나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성준의 편지는 어느 날 돌연 중단되었다. 한 주일이 지나고 또 한 주일이 지나고, 서진은 편지를 기다리고, 눈이 내리고, 그녀가 만든 수감자 작업복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가 실려 나가고, 새로운 옷감이 들어와 쌓이고, 그녀의 머리칼에 실밥과 먼지가 허옇게 내려앉고, 쌓인 눈이 녹고, 해가 바뀌고···
그러나 편지는 영영 오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마침내 잊혀졌구나. 그녀는 울었다. 교도소에 들어온 지 처음, 흐느낌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간들, 무수한 시간들이 병정개미떼처럼 차례차례 그녀를 타넘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행진해가는 것을 그녀는 무력하게, 자포적(自暴的)으로,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잠에서 깨어나면 그녀를 맞는 것은 언제나 시간이 사라져버린 밋밋하고 삭막한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