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순간들, 매혹적인 순간들이었다. 연립주택으로 집을 옮긴 뒤 그와 함께 보낸 조용하고 평온한 한두 달, 의식하지 않으면 대부분 흘러가 잊히고 마는 그 순간들, 뒷산으로 소풍을 가서 그가 책을 읽는 것을 이따금 넘겨다보며 음악을 듣고 잡지를 뒤적이던 순간들, 그런 때면 가슴에 잔잔히 차오르는 느꺼움, 팔베개를 하고 누우면 흥겹게 덤벼드는 흙냄새와 풀냄새, 가끔 물처럼 시원하게 머리를 적시는 바람, 나른한 오후,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에 몸부림치는 나무들, 부르르 몸을 떨며 환호하는 이파리들, 그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면 꺼진 전등이 켜진 듯 문득 환해지는 뒷머리, 의식의 한 자락, 마치 머리를 감은 것처럼··· 그런 것들이 너무 그리워 서진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혹시 어쩌면 그 역시 꿈은 아니었을까. 그 역시 그녀의 무모한 욕심은 아니었을까.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 마주친 현실은 캄캄한 구렁텅이였다···.
성준이 면회를 왔으나 그녀는 면회를 거절했다. 고개를 꺾어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고 이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또 다른 누군가가 입을 죄수복의 단추를 달았다. 저녁 무렵, 교도관이 와서 성준이 영치금이라 불리는 돈을 남기고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녀는 진정 그가 원망스러웠다. 어째서 그는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나를 버리지 않는가?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서진은 더 이상 그를 만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슨 얼굴로 그를 볼 것인가. 그의 시선, 그녀의 모든 것을 낱낱이 펼쳐내는 그 시선, 그녀의 마음 구석구석에 물처럼 스며들어 물처럼 조용히 찰랑거리며 애무하는 그 시선이 없이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가고 있었다. 죽지 않았다. 죽음보다 못한 삶이기는 하나, 아무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일주일 뒤에 성준이 또 면회를 왔으나 그녀는 나가지 않았다. 서진은 두려웠다. 그를 잃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의 시선 앞에서 느끼는 행복을 다시는 맛볼 수 없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아아, 성준이 마침내 기가 질려 그녀를 버리고 말리라는 것이 두려웠다. 두려웠으나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전혀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해줄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두려웠다. 진이의 것이라고, 영원히 진이의 것이라고 성준은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는가···.
성준이 또 면회를 왔으나 그녀는 나가지 않았다. 철창 밖으로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고 날이 저물고 날이 밝았다. 재봉 공장에 나갔다가 감방으로 돌아오면 하루가 가고, 하루가 가면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날짜를 세지 않았고, 자신을 돌보지 않았으며, 날짜를 세는 것을 잊었고, 자신을 방치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가혹한 재판관이 되었다.
피고인 오서진, 징역 일 년형에 처한다. 판사가 선언했을 때 그녀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 년형이라는 것이 일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것은 물론 알았다. 그러나 그것과 피고인 오서진 사이의 관련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는 대마초를 피운 적도 없고 필로폰을 투약한 적도 없었다.
그 저주스러운 밤, 누군가가 맥주를 내밀었을 때 그것을 받아 마신 것뿐이었다. 거기 필로폰이 섞였다는 것을 그녀가 어찌 알 수 있었으랴. 그녀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맥주를 마실 때 거기 필로폰이 섞였는지 아닌지 확인하는가? 어떤 방법으로 확인하는가? 그녀가 독을 마셨다면 그녀는 범죄자가 아니라 차라리 피해자가 아닌가?
그녀가 처음 성준을 만난 것이 그 일이 벌어진 때로부터 몇 시간 뒤였다···.
성준이 또 면회를 왔으나 그녀는 나가지 않았다. 서진은 고개를 꺾고 재봉틀에서 빠져나온 죄수복의 실밥을 뽑고 또 뽑았다. 같은 작업장 수감자들이 나가라고, 어서 나갔다 오라고 권했으나 그녀는 들은 체하지 않았다. 늙은 수감자 한 사람이 투덜거렸다. 저년이 복에 겨워 그런다. 서진은 복인지 화인지 알려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매주 목요일, 성준의 면회는 계속되었고, 서진의 거부도 계속되었다. 그를 만나기를 끈질기게 거부하는 그녀의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저항을 시작했다. 그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더 강렬하고 고집스러워졌다. 매 순간 그녀는 성준 생각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잠시 멍청히 앉아 있을 때마저 성준 생각은 그녀의 그림자가 떨어져 있을 법한 거리 이상으로는 물러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