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허공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성준, 두 사람의 서진, 네 사람의 성준과 서진은 두려움과 의문을 품고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들 외에도 저 밖 어딘가에, 저 어둠 속에, 아니, 바로 저 대정 아파트의 가구 하나하나마다, 이 명선 아파트 골조 덩어리의 방 하나하나마다 그들과 같은, 또 다른 성준과 서진 들이 두려움과 의문을 품고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떠올라 성준은 머리에 쥐가 날 것만 같았다.
그는 무수한 거울들을 떠올렸다. 거울들, 거울 속의 거울들, 또 그 거울 속의 거울들, 거기 반사되는 성준과 서진, 또 성준과 서진, 무수한 성준과 서진 들···. 그 거울들 가운데 하나를 지금 보고 있는 것일까. 저 어둠 속 어딘가에 거대한 거울이, 크고 작은 거울들이 세워져 있는 것일까. 우리는 거울은 보지 못한 채 거울 속의 빛과 그림자만 보는 것은 아닐까. 여기 서 있는 그들 자신도 그 무수한 거울들 속의 무수한 성준과 서진 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자아(自我)라는 것은 어쩌면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인간이란 늘 분열하고 또 분열하며, 스킨답서스처럼, 파생되고 또 파생되는, 무수한 이파리들, 무수한 파편들, 더러는 말라죽어 떨어져버리기도 하고, 더러는 기형적으로 비대해져 또 다른 줄기를 세워 벋어나가기도 하는, 그런 파생체들의 일부 또는 누적에 불과한 것일까. 거울을 보지 못한 채 거기 맺힌 허상만을 본다면 거울의 마술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 아닌가···.
서진이 갑자기 물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성준은 곧 입을 다물었다. 설명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작은 반짝임을 보고 그는 어떻게 대번에 여기 서진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보이는 모든 거울들, 보이지 않는 모든 거울들이 그를 일깨워준 것은 아닐까?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
“거울.”
37
죽어버린 듯한 날들이 갔다. 몇 번이나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살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마침내 확인되지 않았는가. 밥도 넘어가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비쩍비쩍 말라가는 자신의 몸뚱이가 기특했다. 손톱에 반달이 사라지고 살결이 꺼칠해지고 입술이 말라 껍질이 벗겨지는 것도 기특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몸이 그녀의 심사에 기꺼이 복종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배정된 작업은 재봉이었다. 재봉틀을 만져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고참 수감자는 실밥을 뽑고 단추를 달고 다리미질을 하는 것부터 가르쳤다. 하루 종일 단추를 달았다. 하루 종일 실밥을 뽑았다. 하루 종일 다리미질을 했다. 그녀는 말하지 않고 듣지 않았다. 웃지 않았고 울지 않았다. 공포의 근원이었던 감천동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몇 년에 걸친 그녀의 모든 안간힘은 더 지독한 곳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끝났다.
그렇다. 그녀에게는, 남들에게는 모르지만, 계단이 없었다. 있었다면 전락에 이르는 계단만이 있었고, 그 종착지가 이곳이었다. 온갖 빚을 얻어 사들인 그 모든 값비싼 옷과 가방 들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녹색 죄수복 한 벌, 그리고 헝겊으로 만든 누더기 같은 보따리 하나가 전부였다. 그녀가 사 모은 거울들은 셀 수 없이 많았으나 이제 그녀가 쓸 수 있는 단 하나의 거울은 교도관들이 검방(?房)을 들어올 때마다 황급히 감춰야 하는 손톱만 한 거울 파편 하나뿐이었다. 감방 안의 모든 수감자들이 그 거울 조각 하나를 애지중지했다.
그녀는 성준이 말한 괴물이 무엇인지 짐작할 것 같았다. 그녀가 어떤 괴물의 마술에 휘둘렸는지 알 것 같았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그녀는 난폭하고 무모했다.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명품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패션쇼도, 런웨이도, 영화배우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서진의 것이 아니었다. 마약류 관리법 위반 범죄자라는 누명이 그녀의 것이 아니듯이. 성준의 말은 옳았다. 그녀가 진정 원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명과 같았다. 그녀는 남들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것을 구별할 줄 몰랐다. 그녀는 타인들의 그 어마어마한 욕망에 압도당했다. 작은 의심이라도 해볼 틈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