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적어도 지금 돈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만일 얘기를 꺼낸다면 그는 해결책도 더불어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갚건 갚지 못하건 그것은 돈일 따름이었다. 사천 원이건 사천만 원이건 그것은 돈일 뿐이었다. 세상에 흔해빠진 것이 돈이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돈이 그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을 방치할 생각이란 전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힘들고 난감했던 문제가 적어도 훨씬 단순해지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는 물었다. 여기서 술 한잔 할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손전등을 들고 일어서자 서진은 그를 막았다. 왜? 무섭다는 것이었다. 성준은 말했다. 이제껏 캄캄한 데서 혼자서 잘 있다가 무슨 소리야? 그때 서진이 잠깐 웃었던가. 그는 그 모든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려 편의점에서 깡통맥주 여섯 개 포장을 사 들고 순식간에 돌아왔다. 그깟 것 때문에 울고불고 할 거 없어. 맥주나 마셔. 작게 말했건만 그의 말소리가 어둠 속에 메아리쳤다.
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흐느낌이 잦아들고 있었다. 여기 들어와서 같이 술을 마시게 될 줄 상상이라도 한 적 있어? 깡통맥주를 쥐고 난간에 기대어 서자 어두운 허공 건너편, 그가 조금 전 떠나온 아파트의 창과 거실이 보였다. 이곳에서 보니 그것은 손톱만큼 작았다. 저것을 보며 그녀는 울고 있었을 것이요, 전화를 할까, 망설이기도 했을 것이요, 그러다가 휴대전화 고리의 거울이 반짝, 빛났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도 도깨비불 따위나 생각하다니. 그의 상상력은 바닥이었다. 그런 상상력으로 시나리오를 쓰려니 고생이 막심인 것은 당연했다.
그놈들이 뭐라고 해? 진이가 물었다. 성준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놈들 이름이 희한하드라 김두만, 김삼만. 김구만도 있고 김백만도 있대. 벡만 명이나 되는 건가? 서진은 짧게 웃었다. 억지웃음 같았다. 뭐래? 그녀가 다시 물었다. 성준은 지극히 간략하게 그들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들려주었다. 서진은 말없이 들었다. 한숨을 내쉬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또 잠깐 흐느꼈다.
냐아, 고양이가 울었다. 서진이 화들짝 놀라 성준의 팔에 달라붙었다. 거기, 어둠 속에 그들의 동행이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두 개의 푸른 눈이 번득이며 그들을 쏘아보았다. 서진은 바들바들 떨었다. 성준이 그쪽을 향해 빈 맥주깡통을 던졌다. 푸른 눈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성준은 일어나 무심코 어둠 건너편 자신의 아파트를 넘겨다보았고, 그 순간 경악하여 얼어붙었다. 짓눌린 신음 소리가 밀려나왔다.
어둠 저편, 손톱만큼 작은 아파트 베란다에 성준과 서진이 나란히 서서 이쪽을 넘겨다보고 있었다. 그는 서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입을 열 수 없었으므로 그는 건너편 자신의 아파트를 가리켰다. 서진은 비명을 지르듯 저거 뭐야, 하고 물었다. 왜 저래? 성준이 알 리 없었다. 베란다의 성준과 서진은 이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아니, 손을 흔들어대는 것일까. 웃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들도 놀란 것일까.
성준은 문득 양자역학과 초끈이론과 다중우주론을 떠올렸다. 그러나 저기 어둠 너머 그가 조금 전 떠나온 아파트 베란다가 무한한 다중우주 가운데 하나일 리는 없었다. 정말? 어쩌면 조금 전 성준과 서진이 내린 어떤 사소한 선택에 의하여, 그들과는 다른 것을 선택한 또 하나의 성준과 서진의 세계가, 옥수수 줄거리처럼, 이제 막 파생되어 낯선 우주를 향하여 떠나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을 볼 수도 있는 것일까. 성준의 몸이 부르르 경련했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농담이라도 해야 했다. 저거 도둑놈들 아냐? 농담이라기에는 그의 목소리는 터무니없이 크고 어조는 진지했다.
서진은 속삭였다. 저거… 우리들이야. 우린 여기 있는데? 우리하고 똑같이 생겼잖아. 그녀는 뜻밖에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하고 똑같이 생긴 도둑놈들,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어. 그가 말하자 서진은 잠깐 웃었다. 우린… 여기···. 서진은 말을 더듬거렸다. 저 사람들도… 지금 이런 얘기 하는 것 아닌가? 쟤들 누구지, 하면서. 저곳에서는 성준이 수천만 원의 부채에 시달리고 그로 하여 서진이 속을 끓이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