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는 비로소 술과 회를 꺼내놓았다. 옳지, 술이 있어야지. 영규가 환호했다. 제주도로 갈걸 그랬나? 영규는 술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제주도에서의 그 밤, 성준과 정우는 스스로의 이야기에 도취하여 날밤을 꼬박 새웠다. 온갖 생각과 상상으로 그들은 괴물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 밤에 그 괴물은 그들의 눈앞에 너무나 생생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냐? 정우가 묻자 성준이 투덜거렸다. 몇 년은 무슨. 영규는 회를 입 안 가득 우물거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냐. 여기도 훌륭하다. 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녕사굴에 또 한 번 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그곳이 원천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괴물을 발견했다. 괴물에 대한 성준의 생각은 그사이 서진과의 일을 겪으면서 더 구체적이 되었다.
막걸리를 한 잔 단숨에 비우고 영규가 부르짖었다. 달다. 이런 게 바로 술맛이다. 성준은 술맛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입맛이 썼다. 시나리오를 쓰기로 하고 계약금을 받은 날이 저주스러웠다. 그는 묵묵히 막걸리를 비우고 회를 씹었다. 겨우 천만 원에 이리 코가 꿰이다니.
영규가 밑도 끝도 없이 얘기를 꺼냈다. ‘고양이’라는 공장이 있다. 유리병을 만든다. 김 아무개라는 사람이 사장이다. 노동자 백 명이 일한다. 김 사장의 아내는 박 아무개라 하자. 박 아무개가 어느 날 인력파견회사 ‘쥐’를 만든다. 김 사장은 노동자들을 전원 해고하고 이제부터 ‘쥐’사를 통하여 노동자를 고용하겠다고 선언한다.
할 수 없이 직원들은 ‘쥐’사에 입사원서를 내고 ‘쥐’사는 그 노동자들을 ‘고양이’ 공장에 파견 보낸다. 노동자들은 봉급의 십 퍼센트를 ‘쥐’사에 수수료로 내야 한다. 같은 노동자들이 같은 공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 임금만 십 퍼센트 깎인 셈이다. 노동조합도 더불어 박살났다. 김 사장 부부는 훨씬 쉽게 노동자들을 관리하면서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게 되었다. 뭔가 부당하지 않냐?
“이런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어, 지금. 대명천지에. 그런 일을 국가권력이 법적으로 보장해주고 있어. 그런 게 법이래. 그런 게 국가래. 사실은 그런 게 괴물 아니냐?”
술을 주고받으며 그들은 띄엄띄엄 얘기를 계속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 야, 이거 술 더 사와야 되는 거 아니냐? 아, 가만 좀 있어, 형. 형은 어째서 술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려? 그렇다면 바로 그 공장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지. 무슨 용왕대제가 필요한가? 꼭 그렇지는 않다. 단순히 한 공장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 일이 합법의 탈을 쓰고 벌어지는 세상의 생김생김, 그것을 합법으로 만들어내고야 마는 이놈의 세상 시스템, 그것이 괴물이다.
‘고양이’ 공장, ‘쥐’사에서 벌어지는 일이 지난한 노력으로 극복되었다고 하자. 이 괴물이, 그 탐욕이, 그 탐욕의 제도가 살아 있는 한 또 다른 방식으로, 더 극악무도한 방식으로 그런 행위는 계속될 것이다. 그 괴물은 단순히 저 바깥에 있는 것일까? 우리 내면에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사실 괴물의 새끼들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왜? 우리가 그 괴물의 교육을 열심히 받았으니까. 잘했다고 표창장도 받고 장학금도 받고 하면서 어른이 되었으니까. 우리의 사고와 인식에는 그 괴물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어디 인식뿐인가. 무의식까지도 지배를 받고 있으니 탈이지. 괴물의 새끼가 괴물을 죽이는 하극상의 싸움이 바로 괴물과의 싸움이 아닐까.
다른 말로 하면 혁명이 아닌가. 혁명이라는 괴물, 전 세계가 넌덜머리나게 보지 않았던가? 괴물과 싸우기 위해서는 괴물이 필요한가? 꼭 그런 혁명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보다 부드럽고 보다 평화적인 혁명, 그런 것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것도 혁명인가?
돌연 바다 왼쪽 어둠 속에서 나타난 탐색등(探索燈)이 캄캄한 바다를 새하얗게 가로질렀다. 탐색등 불빛은 바다를 샅샅이 훑은 다음 하늘을 구석구석 칼질하다가 사라졌다. 그 날카로운 불빛 앞에서 그들은 어느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탐색등이 상기시키는 것은 명백했다. 저 어둠 속 어딘가에 살의를 품고 적을 찾는 총포들이 은밀히 감춰져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곳은 단순한 바다가 아니었고 단순한 하늘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비린내는 여기에도 있었다. 그들이 앉은 곳에서 북쪽으로 사십여 킬로미터, 차로 삼십여 분만 달리면 이내 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적과 적이 대치한 휴전선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수수께끼 같은 일이지만, 그렇게 살의를 품고 대치한 그 적과 적은 오직 장사를 하기 위해서만 가끔, 아주 잠시 그 휴전선을 열고 사람과 돈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