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바사에서 다르에스살람으로 향하는 버스는 심하게 덜컹거렸다. 비포장도로를 지날 때는 흙먼지가 일어 창문조차 열 수가 없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어깨는 뻣뻣해져 왔다. 케냐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마신 술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몸속 어디선가 출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말 그대로 곤죽이었다. 국경을 통과하며 케냐의 룽가룽가(Lungalunga)에서 잠시, 탄자니아의 호로호로(Horohoro)에서 또 잠시 버스에서 내려 수도꼭지 아래 머릴 처박거나, 온몸을 비트는 일로 혼곤해진 육신을 겨우 달랠 수 있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동아프리카 시골의 눈부신 풍경이 없었더라면, 이건 여행이 아니라 영락없는 고행이었다.
다르에스살람. 여기선 뭔가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동아프리카 예술의 정수이며, 피카소가 찬탄을 금치 못해 자신의 작품에도 슬쩍 끌어들이곤 했던 마콘데 조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헤매는 중이었다. 기대를 걸었던 와타투 갤러리를 비롯한 나이로비의 전시관들에선 아프리카 현대미술의 흐름을 감지했을 뿐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몸바사의 아캄보 빌리지의 크래프트 숍은 허접한 공예품들의 무덤처럼 보였다.
팅가팅가 센터에서 만난 팅가팅가 페인팅의 효시 에드워드 사이디 팅가팅가(Edward Saidi Tingatinga)의 아들은 아버지의 작품을 모사하는 중이었고, 몇몇 작가들은 키스 헤링에게 강한 영감을 주었던 릴랑가(Georges Lilanga)의 캐릭터를 베껴대고 있었다.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데 이골이 난 저 치들이 스승과 아비의 사인까지 베껴먹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르에스살람 또한 나이로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 군데 작업장과 전시장을 거치다 바가모요(Bagamoyo)로 향했다. 바가모요. ‘내 심장을 내려놓고 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인도양의 조그만 소읍이다.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당시 노예들의 비탄에 잠긴 마지막 한 마디가 그대로 이름이 되어버린 마을이다. 다르에스살람의 미술관 큐레이터가 찾아가보라며 적어준 주소는 이름 없는 한 어부의 거주지였다.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마콘데 조각의 신화는 도대체 어디를 가야 실감할 수 있단 말인가.
오랜 세월 동안 마콘데 부족은 동부아프리카의 사바나 고원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주거지역을 북쪽지방의 모잠비크와 탄자니아의 해안 지역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소규모 마을들을 형성해감에 따라, 그들에게는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일거리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그들이 생각해냈던 것은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장려하고 보급하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예술을 보급하는 일에 종사하게 되면서 마콘데 조각은 부족의 울타리를 넘어 동부아프리카는 물론 아프리카 전역에 퍼지게 되었으며, 점차 국제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 마콘데 조각의 위상은 동부아프리카 미술의 대표적인 품목으로 꼽힐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뉴욕과 런던의 아트 갤러리들은 물론 유럽 미술계의 주요 컬렉션 품목에 빠지지 않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조각과 관련한 마콘데 부족의 풍부한 문화적 자산과 그 우수성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던 건 19세기 말부터였다. 부족 내에서 전통적으로 제작되어 오던 마스크나 인물상들의 조형미도 훌륭했지만, 이후 개개인의 탁월한 기량과 조형적 상상력, 그리고 독창성을 겸비한 직업적 조각가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마콘데 조각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전문적 컬렉터들이 나타나고 세계의 저명한 박물관 소장품 목록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와 때를 같이한다.
마콘데 조각의 전통은 물론 이 시기 훨씬 이전부터 형성되어 온 것으로, 마콘데 부족의 탄생신화에는 훗날 펼쳐질 조각예술의 부흥을 예고하고 있다. 신화에 의하면, 태초에 강가에서 외롭게 살고 있던 한 존재가 어느 날 나무기둥을 하나 가져와 여인상을 만들어 집 옆 양지바른 곳에 놓아두었는데, 이튿날 조각이 여인으로 변해있었다. 곧 조각을 만들었던 존재자는 그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였으며, 둘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가 말하자면, 마콘데 부족의 시조가 되었다. 이 말은 즉, 마콘데 부족이 조각에 영혼이 스며 생겨난 사람들임을 의미한다. 신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최초의 존재자와 그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이는 태어난 지 3일 뒤에 죽고 만다. 아내의 요청에 의해 집을 강가에서 갈대들이 자라는 더 높은 장소로 옮긴 뒤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난다. 그러나 그 아이 또한 3일 후에 죽고 말았다. 아내는 다시 집을 울창한 관목이 자라는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기기를 희망한다. 다시 집을 옮긴 뒤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났으며, 그 아이가 건강히 자라 최초의 마콘데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아이는 어떻게 관목 숲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관목이 조각의 재료이고, 시조의 어미가 생명이 깃든 조각상이었음을 감안하면 신화는 마콘데 부족과 조각의 전통이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화는 오늘날까지 마콘데 예술의 주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으며, 여인은 신화뿐만이 아니라, 종교 그리고 예술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조각의 재료는 흔히 모잠비크 흑단이나 에보니(ebony)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콘데인들이 음핑고(Mpingo)라고 부르는 블랙우드다. 아름드리 블랙우드를 톱으로 자른 다음 까뀌를 이용해 대략의 윤곽을 만들어낸다. 망치와 끌 그 밖의 도구가 특별한 효과를 만드는 데 사용되고 있으며, 매끄러운 광택이 필요한 부분은 사포를 이용하기도 하며 조각의 보존을 위해 기름칠을 하기도 한다.
현대 마콘데 조각은 크게 비나다무(binadamu), 우자마(ujamaa) 그리고 쉐타니(shetani) 세 장르로 나뉘어 형상화되고 있다. 비나다무 조각 스타일은 전통사회 속에서의 일상의 모습을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으며, 패밀리 트리(Family Tree)라고도 불리는 우자마는 이리저리 얽힌 군중의 형상을 묘사하고 있으며, 정교하면서도 마치 춤을 추고 있는 상태로 꽉 맞물려진 형상들처럼 활동적이며 생생한 율동감을 전해준다. ‘형제애, 단합, 협력, 단일’ 등을 뜻하는 우자마는 동부아프리카의 정치적 독립과 더불어 화제어로 떠오르기도 했다. 쉐타니는 ‘영혼’이나 ‘귀신’, ‘마귀’를 의미하는데,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악마라기보다는 우리 식의 ‘도깨비’라는 표현에 더 적합한 개념이다. 조각가들에게 쉐타니의 세계는 그들의 예술을 이끌어내는 풍부하고도 끊이지 않는 원천이기도 했으며, 릴랑가에게 작품의 모티브를 제공한 것도 바로 쉐타니였다.
기대가 지나쳤던 탓일까.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확인한 마콘데 조각의 오리지널리티는 남아공의 유명 갤러리들의 소장품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보다 더 뛰어난 작품들은 아마 유럽의 미술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으리라. 그것들 또한 오래전에 이곳에서 피눈물을 떨어뜨렸던 아프리카의 노예들처럼 ‘바가모요’ 한 마디를 남기고 이 해안을 떠나갔을 것이다. 내 마음을 두고 나는 떠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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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