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어머니가 꼭 내 어머니 같을까. 새해 첫 점심을 먹다 기어이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는 언니였다. 2009년 1월 1일, 함민복 시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음 소식을 전한 것은 나였다. 혹여 안 좋은 얘기가 전해지면 잊지 말고 귀띔을 해달라던 언니였다. 우리들은 시인의 순정한 눈동자를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들은 시인의 어머니가 남긴 보청기가 지금쯤 어디 놓여 있을지 잠시 가늠도 해봤을 것이다.
내 어머니든 네 어머니든 세상 모든 어머니의 부재는 늘 그렇게 우리들을 입 다물게 한다. 어머니, 엄마라는 부름에 더는 뒤돌아봐줄 이가 없다는 막막함, 이 깜깜함을 겪은 이는 설움으로, 미처 겪지 못한 이는 두려움으로 아는 연유일 테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라고 했던가. 엄마를 부탁한다는 언니의 당부 섞인 전언에 여전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엄마를 찾고 있다. 그러나 아는가. 엄마는 놓치고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바람이라는 걸, 그 바람을 잡으려는 그 마음이야말로 정말이지 큰 바람이라는 걸.
모두가 엄마를 찾는 것 같아 나는 언니에게 간다. 연재 중인 언니를 두 번이나 꾀어냈다. 인터뷰를 핑계 삼았지만 평소처럼 수다를 떨었고 평소보다 과식했다. 일요일 오후 창성동의 한 카페를 찾았을 때 언니가 앉은 자리 뒤로 큼지막한 창문 사진이 연작으로 프린트되어 있었다. ‘6명의 아들딸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창’, 손으로 쓴 제목이 그랬고 언니는 한참을 서서 그 글씨를 읽고 또 매만졌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언니는 내내 풍경으로 그렇게나 어울렸다.
김민정(이하 김)│오랜만에 뵙네요. 요즘 연재하시느라 많이 바쁘시죠? 2009년 7월부터 시작되었으니 두 달을 훌쩍 넘겼네요. 『어디선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blog.aladdin.co.kr/somewhere), 제목처럼 언니의 전화기도 그간 무척 분주했을 것 같아요.
신경숙(이하 신)│아니야, 아주 잠잠했어. 다들 내게 사적으로는 연락을 안 해. 인터뷰나 원고 써달라거나 그런 전화만 와. 왜들 그럴까.
김│헉, 음, 연재 중이라는 걸 다 아니까 배려 차원이 아니었을까요? 문자 넣기도 조심스럽더라고요. 매일매일 글을 써서 올리시려면 힘들잖아요.
신│그래서인 줄은 알어. 그렇다고 내일 나갈 것을 오늘 쓰거나 그러지는 않지, 민정도 참… 댓글 달리는 인터넷 연재는 처음이라 나도 사실 긴장감 같은 게 있긴 있어. 시작할 때 약간 두렵기도 했고. 정작 해보니까 다른 연재 때와 별로 다른 것 같지는 않아. 발표되는 공간이 다를 뿐인걸. 독자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서 생동감이 느껴지긴 해. 처음엔 특별한 소통을 이루고 싶었는데 글 쓸 때 좀 숨는 체질이라서 성실하게 매번 댓글 달아주는 독자들한테 좀 미안한 맘이 있어.
김│그래도 스트레스가 꽤 크실 것 같아요. 연재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고 들었거든요. 누군가는 살이 다 내린다고도 하던데요.
신│스트레스? 글 쓰는 스트레스를 말한다면 에이, 그 정도도 각오를 안 하면 소설 그만 써야지. 난 작품 쓸 때가 가장 좋아. 작품 쓸 때 컨디션도 가장 좋고 일상적으로도 균형이 이루어져.
김│인터넷 연재 해보시니까 어떠세요?
신│처음엔 조금 두려웠어. 어떤 댓글이 올라올지 모르니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반응이라는 게 사실 두려운 거잖아. 막상 시작을 해보니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로 방문하는 곳이어서 그런지 품위가 있어. 괜한 뒤틀린 심사로 찾는 이들은 거의 없는 거 같고. 내가 느끼기에 오랫동안 나를 쭉 따라 읽었던 독자들이 자주 들르는 것 같기도 해. 어떤 이는 고백하던걸. 내가 아이디 누구누구라고. 혹 내가 다 아는 사람들 아닐까 싶어. 책 읽는 거, 소설 읽는 거 하루아침에 갑자기 되는 건 아니잖아. 읽은 사람들이 또 읽는 거 같아. 소중해졌어. 고맙고.
김│가끔 댓글에 댓글도 달아주고 하시던데 소설 쓰시면서 댓글 다는 일이 그리 만만치는 않으시죠?
신│댓글 읽는 재미에 내가 빠져 있을 때도 있어. 내가 답을 자주 못해서 그렇지 마음먹으면 좋은 소통이 이루어질 것도 같아. 글들을 아주 잘 써서 읽는 재미가 쏠쏠해. 자신들의 일상을 일기처럼 남기는 사람들도 있고…
김│하루 스케줄을 어떻게 보내세요? ‘연재를 마칠 때까지 새벽 3시에 깨어나 아침 9시까지 책상에 앉아 있으려고 합니다’라고 연재를 시작하실 때 글을 올리셨잖아요. 애독자들은 아마 그 시간에 한번쯤은 책상에 앉아 있을 언니를 상상해보기도 했을 거예요.
신│내가 원래 이른 새벽 체질이야. 쭉 그래왔어. 대략 4시면 일어났었어. 작품 안 쓸 때도 그 시간에 일어나 책도 보고 짧은 글도 쓰고 이런저런 것 정리도 하고 그래. 연재 시작하면서 한 시간 당겨 3시로 강화시켜본 거고. 나는 아주 단순한 스케줄로 움직여. 9시 되면 요가원 갔다 와서 점심 먹고 낮잠 조금 자고. 낮잠은 있잖아, 조금 잔 날하고 아닌 날하고 많이 달라. 어느 순간 졸음이 수마처럼 몰려올 때가 있는데 그때 빨리 자야 해. 물론 나처럼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한 일이지만. 짧은 낮잠이 얼마나 고소한데. 나는 너무 힘들다, 벅차다 그러면 일단 자. 안 좋은 일이 생겨도 금방 해결하려고 나서게 안 되고 일단 자고봐. 그냥 자. 깨어나면 곁가지들은 정리되어 있기도 해. 내 몸이 알아서 견디기 벅찬 일들을 거부하느라고 그런가봐. 도피하고는 좀 다른 잠이랄까.
김│『어디선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이 소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물론 현재진행형(인터뷰가 진행되던 구월 시점, 2010년 1월 현재 연재 종료됨 - 편집자)이지만 언니에게는 어떤 작품인가요.
신│‘연재를 시작하며’에도 쓴 말인데 나는 헤르만 헤세나 앙드레 지드나 이런 소설들 읽으며 성장기를 지내온 세대 축에 들겠지. 90년대의 젊은이들에겐 일본 소설들이 성장통을 대변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았어.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작가로서 젊은이들과 함께 청춘을 통과해내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소설이 있었으면 했어. 그걸 시도해보고 있는 중이야.
김│요가의 달인이 되셨다는 소문이 들려요. 정말 물구나무서다가 주무신 적도 있어요? 그게 가능해요?
신│자다니? 그럴 리가? (하하) 잠깐 졸긴 하지. 어쩌다 맨 잠 이야기네. 물구나무서면 집중력이 강해져. 인간은 직립이잖아. 늘 서 있으니 장이니 위니 이런 게 다 아래로 처지게 되었잖아. 물구나무설 때의 위치가 원래 위치래. 사실인지는 모르고 요가 선생 말은 그래. 거꾸로 서 있을 때 제자리를 찾는다는 말이 좋더라구. 그래서 기를 쓰고 연습했어. 보통 사람들은 요가를 6개월 정도 하면 다들 물구나무서. 나는 두려움이 많고 몸치라서 1년 반이 걸린 거지. 처음에는 균형이 안 잡혀서 수도 없이 뒤로 넘어졌어. 남진우씨 놀라서 뛰어나오고 그랬어. 열 번 스무 번 자꾸만 넘어지니까 그거 통해서 균형이 생기더라구. 몸이 알더라구. 넘어지려고 하면 충격을 덜 받게 스스로 작용을 막 하던걸. 민정이도 요가를 배워. 아주 좋아.
김│전 한 달 끊었다가 세 번 나가고 포기한 적 있어요. 완전 김뻣뻣이라서요.
신│덜 아픈 거지 뭐. 나는 몸을 너무 혹사시켜 탈진한 상태에서 시작했어. 무엇이든 시작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더라구. 그때 주변에서 요가를 권유했어. 『리진』을 쓰려고 하면서부터 요가를 시작했는데 『리진』이랑 『엄마를 부탁해』랑 지금 쓰고 있는 연재소설이랑 쓰게 해주는 체력을 유지시켜준 건 다 요가 덕이라고봐. 하루에 딱 한 시간 몸을 달래주듯이, 위로하듯이, 너무 써먹어서 미안하다 이러면서 내 몸을 쳐다보고 바라봐봐. 내가 내 몸한테 얼마나 가혹하고 무심한지, 내 몸이 얼마나 평화를 원하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자기 몸인데도 모르거든. 요가의 완성은 결국 호흡이야, 숨쉬기. 요가 방식대로 호흡하다 보면 집중력이 생겨서 책 읽는 데도 무지 도움이 돼. 머리도 맑아지고.
김│언니 책 정말 많이 읽으시죠? 언니 소설을 보면요, 소설을 부르는 소설 같아요. 꼭 사서 읽어야지 싶은 책들이 생겨서 메모를 하게 된다니까요. 요즘에는 어떤 책을 읽으세요?
신│연재 때문에 요즘엔 책을 집중해 못 읽고 있어. 읽어도 스치듯이 읽게 돼. 동인문학상 심사 중에 있으니까 거기 해당되는 소설들 따라 읽는데 벅찰 때도 많아. 소설 쓸 때는 자료로 읽는 책들이 많아져. 근년엔 한 인간에 대한 집중도 있는 책들을 꽤 읽은 것 같아. 전기나 자서전류. 실비아 플러스 일기, 재클린 뒤프레 전기, 마더 테레사에 관한 것들… 그러다가 『리스본행 야간열차』 같은 소설도 읽고 『파워아트』 같은 책도 보고… 두서없어. 잡식이니까. 여행서도 꽂히면 앉은자리에서 다 보지. 언젠가 가봐야지, 하면서. 하여간 요근래 나는 그렇게 난 못 살지만 누군가 살아낸 어떤 삶들에 대한 신뢰, 존경 같은 거 땜에 전기집이나 자서전을 꽤 찾아 읽는 것 같아. 연재 끝나면 책 좀 집중해 읽어야지. 내년엔 나도 책 읽는 해로 만들까 해.
김│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은 어떻게 지으세요? 사실 이름 짓는 일이 참 어려운 거잖아요.
신│응. 이름 짓기 어려워. 노트를 하나 마련해서는 차근차근 적어보기도 하고. 소설이 생겨나고 있을 때는 온통 머릿속이 그 생각뿐이니까 뭘 보든지 관련지어봐. ‘담아’라는 식당에서 단이라는 이름이 나오기도 하고 ‘미루’ 같은 이름은 ‘미루나무’에서 ‘미루’만 따봤어. 한국 소설의 경우 이름 짓기가 참 힘들어. 외국 소설 같은 경우에는 이름 자체가 소설 제목이 되는 경우도 꽤 있는데 우리 이름은 좀 애매하거든. 단편에서는 거의 이름을 안 지어. 그와 그녀라고 많이 해. 개인적으론 이미 느낌을 가지고 있는 이름은 피하는 편이야. 가능한 한 내가 쓰려고 하는 성격이 고스란히 들어갈 수 있는 자유롭고 유연한 이름들을 선호하는 것 같아.
김│‘미루’도 그렇고 ‘단’도 그렇고 언니의 소설 속 인물에게서 식물성이 느껴져요. 채식주의자들 같다고나 할까요.
신│그런가? 그런 생각은 따로 안 해봤는데. 보통은 외자를 많이 지어. 그 뒤는 알아서 상상하라고. 그리고 이름과 이름이 서로 통하도록 짓지. 예를 들어 ‘윤’과 ‘단’도 그 사이에 뭐가 흘러가고 흘러들듯이. 그런데 남자 이름 짓기는 정말 힘든 것 같아. 초등학교 때 앨범부터 쭉 펼쳐놓고 출석 부르듯이 이름들을 불러보기도 해.
김│앨범이라… 어렸을 때 언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신│초등학교 6학년 때 찍은 졸업 사진이 내 일생에서 두 번째로 찍은 사진이었어. 내가 우리 집에서 태어난 네 번째 아이야. 내 백일 때 아버지가 읍내 사진관에 식구들을 데리고 가서 의자에 단정히 앉아서 찍은 게 처음. 자식은 그만 낳을 생각이라서 찍은 거래. 그 아래로 동생이 둘이나 더 생겼지만. 우리 때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사진 찍을 일이 없었어.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지 나이 든 사람 같다, 그치?
김│고향이 정읍이시잖아요. 어렸을 때 친구들은 종종 만나세요?
신│자기들끼리는 만나는 것 같어. 나는 따로 연락하는 이들이 없어. 지난번 사인회에서 누군가가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고 일부러 온 거라면서 반갑다고 막 웃는데 난 모르겠더라구. 그런데 이름을 말하니까 생각이 나는 거야. 걔가 나, 최수정이라고 말하는 순간, 지금 내 눈앞의 최수정이 아니라 아주 어릴 때 내가 기억하는 최수정, 그 최수정이 떠오르는 거야. 그 최수정이 자주 연락은 해.
김│초등학생 신경숙은 어떤 어린이였을까요.
신│키가 컸어. 매번 맨 뒷자리에 앉아 있곤 했지. 지금 내 키가 중학교 1학년 때랑 똑같거든. 다른 친구들보다 늘 목이 하나 더 컸어. 배구 하라고, 사이클 하라고 선생님들이 운동선수 뽑을 때마다 지목을 하셨어.
김│운동선수라, 그런데 왜 안 하신 거예요?
신│일단 내가 운동에 관심이 없었어. 우리 집과 학교가 멀기도 했고. 운동선수가 되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하잖아. 수업 끝나고 연습하고 집에 가기엔 너무 멀었어. 집에서 학교까지 한 10리를 걸어다녔으니까. 지금 내가 건강하다면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아침저녁 도합 20리를 걸었다는 거, 산길 들길 이런 데를 걸었다는 거, 아마 그 이유가 클 거야. 걷는다는 거 참 놀라운 것이, 그때 걸으면서 눈으로 봤던 풍경들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 시골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사계절이 그냥 와 닿았어. 자연에 대한 감각 같은 건 그렇게 저절로 내 몸에 스며든 것 같아.
김│저만 해도 걸어서 학교를 다닌 기억이 없거든요. 걷다 보면 왜 좀 센티멘털해지기도 하잖아요. 언니의 예민한 감수성이 이런 과정 속에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한데요, 책은 원래부터 가까이 두셨어요?
신│저절로, 자석처럼, 한순간에, 끌렸어. 도무지 안 좋아할 수가 없는 거잖아, 책은.
김│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랄까요, 충격이다 싶을 만큼 감동을 받은 책이 있다면요.
신│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아. 우리 집 헛간에서 오빠가 빌려온 책을 몰래 읽는 중이었는데 책을 읽다가 그렇게 울어보긴 처음이었던 것 같아. 너무 슬펐어. 인간의 발을 얻기 위해서는 인어의 혀가 잘리고, 발을 얻은 뒤에는 혀가 없어서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가 없고.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칼을 꽂으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못 그러고 끝끝내 공기의 딸로 사라지잖아. 내가 그거 읽고 하도 우니까 어머니가 에미가 죽어도 이리 서럽게는 안 울 것이네, 하면서 달랬던 기억이 나. 안데르센은 동화작가 아닌 거 같어. 아이들에게 너무 상처를 줘. 하긴 아이들도 슬픔을 알아야 해. 일찍 아는 게 나을지도 몰라.
김│친구들 사이에서 책 많이 읽는 아이로 유명했을 것 같아요.
신│오빠가 셋인데 셋째 오빠가 책을 많이 읽었어. 나는 그이가 읽으려고 가져다 놓은 책들을 주로 읽었는데 오빠가 시를 좋아해서 『고통의 축제』, 『삼남에 내리는 눈』, 『농무』 같은 시집을 그 시골에서 중학교 때 읽을 수가 있었어.
김│어릴 때부터 편지를 즐겨 썼다는 얘기를 어느 글에선가 읽은 기억이 나요. 생각해보니까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편지지 같은 것도 취미삼아 사러 다니고 또 모으고.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었다면 불가한 일일지도 모르는데요.
신│중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왔기 때문에 그때 친구들이 없어. 그냥 어렴풋이 친구들 편지 대신 써줬던 것들만 생각나. 내 글씨가 다른 애들 눈에는 예뻐 보였는지 지들이 써서 글씨만 부탁하는 아이들도 있었어. 중학교 다닐 때는 국군 아저씨께 위문편지 같은 것도 보내고 펜팔도 하고 그랬던 거 같아. 시골을 떠나와서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유년 시절 함께 보낸 두 친구와 오래 편지를 주고받았어.
김│지금 언니의 편지를 갖고 있는 친구도 어딘가에 있겠군요.
신│중학교 때 친구 하나와도 꽤 오래 편지를 주고받았어. 나도 걔 편지 갖고 있고, 걔도 아마 그럴 거야. 대학 졸업하고 그 친구가 서울 와서 방송국에서 한참 같이 일했는데 그때 우리 둘이 갖고 있는 편지를 서로 바꾸자 한 적도 있었는데 그대로 또 흘러버렸네.
김│서울예대 문창과에 입학하셨지요.
신│응, 나는 1982년에 대학에 입학했어. 다니던 고등학교가 야간이고 상업고였어. 그래서 나 혼자만 대학에 간 경우였어.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나보다 거의 나이가 대여섯 살씩 많아서 친구라고 하기보단 다 언니들이었지. 주간 아이들 속에 섞여 연습도 한 번 안 하고 체력장 보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학력고사 치르고 그랬어.
김│일찌감치 전공을 소설로 정한 계기가 따로 있으셨다고 들었어요.
신│고등학교 때 오래 결석을 한 적이 있는데 국어 선생님이 벌로 썼던 반성문을 보시고는 소설을 써보라시는 거야. 남산에 가면 예술학교가 하나 있는데 거길 가면 소설을 쓸 수 있다고. 그게 바로 서울예대야. 그때 그 국어 선생님은 내겐 잊을 수 없는 분이지. 그 선생님 덕분에 고등학교 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광장』 같은 걸 미리 읽을 수 있었으니까. 일찍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고.
김│그렇다면 대학이 천국이었겠네요.
신│아니야, 처음 한 달간은 적응을 못해서 그런 지옥이 또 없었어. 스무 살 되면서 성격이 극단적으로 바뀌었거든. 어릴 때는 굉장히 낙천적이고 긍정적이고 잘 웃고 그랬는데 고등학교 통과해오면서 성격이 그 반대로 바뀌었어. 늘 버겁고 힘겨웠던 것 같아. 게다가 위축감도 컸고. 처음엔 너무 독특한 분위기에 적응을 못해서 혼자 그냥 걸어다니고 그랬어. 명동이나 남산 같은 데. 얼마 지나니까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얘기하는 게 수업인 이 학교가 완전 나를 위한 학교처럼 느껴지더라. 그래 맞아. 내게 그 학교는 천국이었어.
김│왜 처음에 문창과에 입학하면 글을 써내라고 하잖아요. 그때 교수님들의 평은 어떠하셨나요.
신│소설 은사는 소설 쓰라 하시고, 시 은사께서는 시 쓰라 하시고. 돌아가신 오규원 선생님은 소설가는 잡스러워야 하는데 내 체질이 그러지 못해 소설가 못 된다고 시를 써라, 하셨어. 나는 시인이 되려고 하지 않았을 뿐 늘 시를 습작했어. 하루에도 몇 편씩. 물론 시가 아니지 습작이지. 난 소설가가 되겠다고 이미 정했기 때문에 시를 습작하면서도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흔들린 적은 없었어.
김│언니의 대학 시절 글쓰기 풍경을 묘사해주신다면요. 습작 훈련이랄까요.
신│왜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넘어가는 3개월 정도의 시간 있잖아. 난 그때 한국문학전집 60권짜리를 다 읽었어.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게 이광수부터 윤흥길까지 다 들어 있는 시리즈였어. 강호무의 「화류항사」 같은 작품, 아주 특이하고 독특한 작품들도 그때 읽었어. 하여간 그 전집으로 50년대 60년대 70년대 소설들을 거의 다 섭렵했어. 방학은 늘 시골에 가서 보냈는데 가지고 간 책들을 다 읽어버린 후엔 지루하니까 필사도 해보고 습작도 해보고 그랬지. 오정희, 최인훈, 윤흥길, 서정인, 이제하, 박완서, 이런 선생님들 작품들. 시도 많이 읽었고.
김│등단이 1985년 『문예중앙』을 통해서였으니 우리 나이로 스물세 살, 이른 데뷔셨어요.
신│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였지. 그때 이문구, 김병익, 홍성원 선생님이 심사위원이셨어.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이미 고인이 되셨네. 그 시절 사회적인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둡고 침침하던 때라 다들 웃지도 않고 늘 체한 얼굴들처럼 보였어. 나는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퇴근하고 집 근처 독서실에 가서 소설을 썼어. 동생과 한 방을 쓸 때였으니까 소설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독서실 이용료가 하루에 천 원인가 그랬는데 3만 원쯤으로 한 달권을 끊어서 원고지에 소설을 썼어. 어느 날은 하루에 세 장 쓰고 또 어느 날은 잘되어서 열 장도 쓰고.
김│제목이 ‘겨울우화’였던 걸로 알아요. 동명의 창작집이 고려원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었지요. ‘우화’라는 말이 여름과 붙으면 안 어울리는데 이상하게 겨울 옆에 서면 딱 붙어요.
신│『문예중앙』 마감이 9월 30일인가 그랬어. 제목을 ‘겨울우화’라고 해놓고는 맘에 들지 않아서 제목 써 넣는 곳은 비워놓은 채 마감날 우체국에 가 원고지에 구멍을 뚫고 까만 먹끈으로 묶은 뒤에 대기 의자에 앉아 맨 앞장에 ‘겨울우화’라고 적어 넣었던 기억이 나. 끝까지 다른 제목을 짓고 싶었던 것 같아. 그게 그러니까 벌써 24~25년 전의 일이네.
김│『풍금이 있던 자리』가 제겐 참 기억에 남아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인천시민서점에 들러 직접 샀던 책이거든요. 토요일이었고, 교복을 입고 있었고, 한 손에는 도시락 가방을 들고 있었고. 어떻게 그 책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화학 수업 시간에 교과서 밑에 깔아놓고 읽다 걸려서 그 책 모서리로 얻어맞기도 했는데.
신│아이고, 민정에게는 꽤 아픈 책이었구나. 내가 서른 살 때 『풍금이 있던 자리』가 나왔어. 그때는 서른 살이라는 게 엄청난 나이인 줄 알고 무척이나 울적해했던 것 같아.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늘 어떤 식으로든 밥벌이를 하느라 등단만 일찍 해놓고 소설에 집중해보질 못해 더 그랬던 것 같아. 허무한 거야.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집중적으로 해보지도 못한 채 서른 살을 맞이하나 싶은 게. 그래서 밥벌이를 접고 들어앉아 소설만 썼어. 글을 쓰면서 그때가 가장 불안하고 가장 행복했던 거 같아. 스물여덟 가을에서 스물아홉 가을까지, 1년 동안 그 창작집 안에 있는 모든 소설을 다 썼어. 그렇게 1993년 4월, 책이 나왔어.
김│그때 반응이 엄청 좋았지요?
신│응,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책도 나왔으니 다시 일자리를 찾고 있었어. 근데 일주일 있다 재판 찍고 또 일주일 있다 재판 찍고 그러는 거야. 소설로 먹고살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어. 상상도 안 되는 일이었지. 그런데 그런 일이 생겼어. 나도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더라고. 『풍금이 있던 자리』는 내게 넓은 책상과 작업실을 갖게 해준 작품이야. 경제적으로 독립을 시켜줬지. 소설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다주었고.
김│언니는 어떤 분들과 친하게 지내셨나요.
신│학교 다닐 때엔 잘 몰랐고 졸업하고 나서 황인숙, 양선희 시인들과 많이 어울렸어. 나중엔 허수경 시인과도. 주로 시인들과 지냈어. 아름다운 시절이었어. 서른 살도 함께 되었고 그 이후도 줄곧… 만났다 헤어지고 집에 와서도 뭣이 궁금한지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또 전화하고. 내 청춘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고 보면 돼. 메일이라든가 하는 게 없었던 때니까 겨울이나 여름에 시골집에 내려가면 꼭꼭 서울에 남아 있는 그들에게 편지를 썼어. 그러고 보면 내게 편지는 습작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 같아.
김│허수경 시인의 시집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에 언니가 발문을 썼지요. “「풍금이 있던 자리」를 쓸 적에는 새벽마다 수경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쓴 만큼 읽어주기도 했다. 쉼표가 나올 때는 쉼표, 말줄임표가 나올 때면 말줄임표 하면서. (…) 수경이 미발표 시도 한번 들어볼 테냐? 하면서 낭독해주기도 했다. 『혼자 가는 먼 집』 속에 수록된 상당수의 시들을 나는 발표 전에 듣는 복됨을 누렸다.” 그걸 읽으면서 내게 친구란 하며 하염없이 어떤 이미지를 붙잡고 가늠해본 적이 있어요. 부러웠거든요.
신│시를 봐서도 허수경씨는 원래 정이 많은 사람이야. 다정이 병일 정도지. 독일에 가면 내가 머무는 도시로 허수경씨가 와서 함께 지내곤 했어. 내가 뭘 가져갈까 물으면 노래책 가져오라고 했어.
김│노래책이요?
신│왜 두꺼운 노래책 있잖아, 『우리 노래 600년』 같은 거, 최신곡만이 아니라 옛날 노래부터 다 나와 있는 거. 그거 여행 가방에 넣어 가지고 가서 프랑크푸르트 같은 호텔 침대에 엎드려서 한 장씩 넘겨가면서 노랠 부르곤 했어. <개여울> 같은 거.
김│한 침대에 누워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친구를 만난다는 거, 저는 단 한 번도 꿈꿔보지 못했어요. 제가 마음을 열지 못한 탓이 가장 크겠지만요.
신│우리가 함께 지내던 시절은 암담하던 때야. 시대가 그래서 개인적으로 오히려 서로 의지를 많이 했던 것 같아. 우리는 늘 만났어. 그러지 않으면 불안했으니까. 만나서 하염없이 함께 걸었어. 진짜 차비가 없어서 걷기도 했어. 걷다가 선배를 만나 토큰을 얻기도 했고, 다방 레지 언니한테 빌릴 때도 있었어. 우리들 중 누군가가 취직을 하면 그가 우리를 데리러 올 때까지 광화문에 있는 양지다방에 앉아 기다리기도 했어. 지금 거기는 외국어학원으로 바뀌었다가 최근엔 샤브샤브집이 된 거 같더라. 돌이켜보면 정말 영혼을 나누는 시절이었던 거야. 우리는, 정말이지, 서로에게, 깊숙이 관여를 했지. 우리는 서로에게밖에 갈 데가 없었거든. 그 덕분이겠지. 10여 년씩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거 같아. 오래 못 만나도 멀어졌다는 감이 없어.
김│『엄마를 부탁해』가 100쇄 100만을 찍었어요. 작년 11월에 나온 책이니 채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놀라운 기록을 세운 게 아닐까 해요. 기분이 어떠세요? 여기저기서 엄마, 엄마, 그러는 얘기 참 많이 들으실 텐데요.
신│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 작품을 썼을 때 가졌던 첫 마음들이 내 손을 다 떠나버린 느낌이야. 기대와 예상만 뛰어넘은 게 아니라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도 하염없이 뛰어넘어가버렸어. 그게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기도 했는데 그것마저도 부질없을 만큼 내게서 너무 멀리 가버렸어. 엄마에게 의지하자는 게 아니라 엄마가 필요한, 엄마마저도 이해하고 껴안아주는 사랑이 뭘까, 생각하며 쓴 거야. 내게는 그것이 문학이야. 이해할지 모르겠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니까 나도 이 작품이 낯설어. 객관적인 거리감이 생기는 건 좋은데 사람들이 막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 짠하기도 하고 그래. 내겐 다른 작품과 똑같은 문학 텍스트인데.
김│유치한 질문이겠지만요, 아버지를 소재로 한 작품 계획은 없으세요?
신│아니, 없어.
김│언제 언니는 엄마 생각 많이 나요? 늘 그렇겠지만 아주 간절할 때가 있잖아요.
신│엄마가 허리 수술을 하셔서 지난 2월부터 엄마가 담가주는 김치를 못 먹고 있어. 냉장고에 묵은지만 가득이야. 어렸을 때 오빠들이랑 자취할 때는 김치도 담가 먹고 했는데 지금은 김치 담글 엄두가 안 나. 늘 엄마가 떨어지지 않게 담가주셨지. 김치로부터 독립을 해야 엄마로부터의 제대로 된 독립인데… 어라,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네. 아무튼 예전에는 내가 울적할 때면 가장 먼저 생각났는데 지금은 행복할 때도 가장 먼저 생각나. 좋은 거 보면 이거 함께 보면 좋을 텐데, 싶고. 내게 엄마는 모국어야. 내 모국어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늘 바라지.
김│부탁, 부탁 말이에요. 언니, 언니는 앞으로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하게 될까요.
신│응? 잠깐만. 누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내왔네. 이거 염전 아냐? 민정아, 이것 좀 봐, 누가 이걸 다 찍어 보냈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아, 그치? 아, 맞아, 부탁, 부탁이랬지? 나는 아무 부탁도 안 하고 싶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김│언니, 근데 혹시 욕할 줄 아세요?
신│욕? 나? 음, 나쁜 놈…
김│네? 나쁜 놈요? 어휴, 그게 무슨 욕이에요. 언니, 앞으로 욕은 제게 부탁하세요. (*)
신경숙ㅣ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강물이 될 때까지』, 『풍금이 있던 자리』, 『감자 먹는 사람들』, 『딸기밭 』, 『종소리』등이 있고, 장편소설로는 『깊은 슬픔』, 『외딴 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리진』, 『엄마를 부탁해』 등이 있다. 짧은소설집 『J이야기』,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자거라, 내 슬픔아』와 한일 양국을 오간 왕복 서간집 『산이 있는 집 우물이 있는 집』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현대문학상·만해문학상·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