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호수 도시로 떠나다 ①
다음 날 아침 나는 아버지와 함께 우리 가족의 새 집을 알아보기 위해 광주로 올라갔다. 아버지의 동행으로 내정돼 있던 엄마가 아침부터 위의 통증을 호소하는 바람에 급하게 결정된 광주행이었다. 둘째 누나가 두 어른을 돌보기 위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나는 저항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도 전같이 내가 학교 수업을 하루 빼먹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광주행 열차 안에서도 아버지는 담담했다. 초희 누나가 떠났을 때처럼 무언가를 견디는 표정도 아니었고, 매형이 대형 사고를 쳤을 때처럼 기막혀 하지도 않았다. 감정을 도려낸 사람같이 말간 눈을 하고 열차의 진동에 몸을 맡긴 채 자다 깨다 하는 상태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광주에 도착해 전셋집을 알아보고 다닐 때도 아버지는 여전했다. 평생 직장생활 외엔 해본 적이 없는 쉰두 살 남자가 전 재산인 퇴직금으로 낯선 도시에서 도박을 하려 한다는 제 현실에조차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햇빛 아래 유유히 반짝이는 큰 강을 보며 자신을 맡길 채비를 하는 작은 강의 지류 같았다.
해질녘에 광주에 올라오면 꼭 들르는 복천각에서 친척 아저씨와 저녁을 먹을 때, 아버지는 독한 빼갈 세 잔을 연거푸 마셨다.
“그냥 살아야죠……. 살아내야죠. 사는데 이유가 어딨습니까? 목숨이 붙어 있으니 계속 숨 쉬게 하는 쪽으로 허우적거려 보는 거죠. 그러다 죽음이 턱 찾아오면 아, 이제야 좀 쉬겠구나, 하고 그쪽으로 가면 되는 거고.”
나는 상당한 양의 술을 마셨는데도 전혀 습기가 돌지 않는 아버지의 얼굴을 멍하게 봤다. 그러나 함께 집에 가자고 하는 친척을 애써 뿌리치고 여관에 투숙한 뒤 아버지는 자정이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억눌러온 감정들이 투두둑 터져 나오는지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 몸을 뒤척였다. 아버지랑 등을 맞대고 누운 나의 가슴에서도 불안의 입자들이 뛰쳐나왔다.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올라 팔짱을 낀 채 몸을 잔뜩 구부려야 했다. 아버지의 한숨과 내 한숨이 결합해 화학 작용을 일으키면 둘이 미친 듯이 화를 내거나 통곡을 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
다음 날 새벽 나는 때 묻은 크림색 나일론 커튼을 투과한 빛 속에서 눈을 떴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은 와주지 않았다. 머릿속이 꽝꽝 언 겨울 강처럼 맑았다. 나는 아버지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났다. 잠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돼버린 듯 몸이 가뿐했다.
나는 방을 나와 여관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호수 쪽으로 걸어갔다. 입구의 낡은 목조 팻말을 보고서야 그 호수가 말로만 듣던 경향호라는 걸 알았다. 경향호는 시 외곽에서 도시의 서쪽을 작은 쿠션처럼 받쳐주고 있는 제법 큰 호수였다. 머지않아 경향호가 매립되고 그 위에 새 시청 청사가 들어설 거라는 풍문이 도시 근교까지 파다하다고 했다.
호수를 향해 걸어갈수록 기분이 이상했다. 멀리서 볼 땐 도시의 통풍구같이 서늘하고 아름답기만 하던 호수 곳곳에 시큼한 악취가 괴어 있었다. 안개에 뒤덮인 호수 전체가 거대한 하수구 같았다. 투명함이라곤 없는 호수 수면엔 물안개가 가득했고, 가장자리엔 지저분한 쓰레기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비닐봉지와 헌옷가지, 흙빛이 된 젖은 봉투, 깨진 술병 따위를 피해 조심조심 걷던 나는 어떤 뭉클한 물체를 밟고 휘청거렸다. 나는 긴 꼬챙이를 주워 발 앞의 비닐덩어리를 헤집어봤다. 물체 여기저기를 쿡쿡 찔러보던 나는 곧 꼬챙이를 떨어뜨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아…… 아, 아악!”
큼직한 고깃덩이 같은 그 검붉은 덩어리는 끔찍하게도 갓난아기였다. 동우의 갓난아기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나로선 알아볼 수밖에 없는 거북한 형체였다. 내 비명 소리는 내 몸 밖에서 내장 속으로 역류해 딴딴히 뭉쳐들었다.
나는 미친 듯이 여관 쪽으로 달렸다. 뻑뻑한 우윳빛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팔다리를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 봐도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았다. 비닐에 싸인 죽은 갓난아기가 살아나 나를 쫓아올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밝고 선명하기만 하던 함평의 아침과는 완전히 다른 불투명하고 불결한 아침이었다.
두 시간 뒤 아버지와 함께 여관 밖으로 나왔을 땐 풍경이 또 달라져 있었다. 적군의 군대처럼 위협적인 안개가 걷히자 호수는 나른해 보였다. 마침 호수 건너편의 한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청색 제복을 입은 처녀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굵은 파란색 허리띠 같기도 한 그 긴 행렬 속의 처녀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한 개의 틀로 찍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걷고 있는데도 패배가 예정된 전투를 하러 나가는 군인들같이 비장해 보였다. 아버지도 그 모습이 인상적인지 눈을 가늘게 뜨고 담배를 피웠다.
“방직공장으로 출근하는 여공들이란다.”
“여공이요?”
“그래, 제가 벌지 않으면 결혼할 밑천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처녀들이겠지. 여염집 식모로 살다 고만고만한 남자 만나 결혼하는 처녀들 보단 적극적인 성격들일 테고. 야근까지 해가며 뼈 빠지게 벌어 시골집 생활비 보태고 남자 형제들 공부시키고…….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돼 있지. 연애를 해도 앞날 없는 불장난에 빠져들기가 쉽고 때론 돈을 다 잃기도 하고, 심지어 술집으로 빠지는 애들도 많다더라. 이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지?”
날카로운 충격이 내 내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더럽고 몽롱한 경향호 언저리에 버려진 갓난아기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엄마의 자궁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버려져 부패해갈 아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공장을 향해 걷고 있는 여공들의 행렬을 멍하게 바라봤다. 죽은 아기의 엄마가 저렇듯 앳된 얼굴을 한 여공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기를 죽여 호숫가에 버리고서도 계속 살아가기 위해 일터로 가는 모습이 더 끔찍한 악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죽은 아기의 엄마를 한심해하거나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
다음 날 정오쯤 우리 가족의 새 집은 경향호 주변의 단독주택으로 정해졌다. 이 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전세 독채라고 했다. 복덕방 주인은 도시 변두리의 평범한 집답게 마당은 손바닥만 하지만 지은 지 오 년밖에 안 된데다 자재도 괜찮다고 거듭 강조했다.
전날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하고 겨우 자장면을 반 넘게 먹고 있던 나는 입안의 국수를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인상을 썼다. 아버지는 내가 체했다고 생각했는지 내 등을 건성으로 두드리며 복덕방 주인과 계속 이야기했다. 간신히 자장면을 삼키고 아버지의 선택을 반대하는 이유들을 골라볼 때, 아버지는 복덕방 주인이 내민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버렸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싫어요. 그 집은……. 그 호숫가는.”
아차, 싶어진 나는 일단 다소곳하게 앉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반대 따위는 무시하고 통고하듯이 말했다.
“주변이 좀 불결하긴 하지만 전망은 괜찮아. 아니 좋아. 경향호가 매립되고 그 자리로 시청이 옮겨 앉는다는 소문이 파다해. 그럼 그곳이 중심 상권이 되겠지. 일 년 반 안에 매립공사가 시작될 거라는 말이 관에서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어. 사무실은 중심가와 집 중간에 얻고 신시가지가 형성되면 그곳으로 옮겨야지. 운이 나쁘지 않아서 우리가 가진 돈으로 이만한 집을 구한 거야.”
아버지는 인사를 한 뒤 복덕방을 나왔다. 아버지는 터미널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계속 들뜬 목소리로 광주의 발전 전망에 대해 얘기했다. 나도 계속 기분이 나빴다. 죽어서 축축한 흙이 된 아기 위로 원기왕성한 사람들의 꿈과 희망, 욕심으로 얼룩덜룩해진 도시가 들어선다는 것이. 죽을 순 없어서 산다는 아버지의 말도 핑계고 끊임없이 더 갖고 싶어 하며 번성해가는 욕망이 실체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함평행 버스 안에서 나는 토할 것만 같은 상태를 꾹 참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중간에 정차한 터미널의 약국에서 멀미약을 사 먹인 뒤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의 손이 하는 말을 나는 알아들었다.
‘죽은 갓난아이 따위 잊어버려라. 남자답게.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죽은 아이라면 이미 열등한 조건을 타고난 아이야. 나쁜 운을 집어든 것만으로도 못나고 무력한 놈인 거야.’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일어섰다. 아버지가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버스 밖으로 달려 나와 비포장도로 옆 개망초 꽃 덤불 위로 위액에 삭은 자장면을 토해냈다. 나는 따라 내려와 등을 두드려주지도 않고 차 안에서 내 나약함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의 눈길이 등을 가르는 걸 느끼며 고통을 겨우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