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우리들의 하얀 거짓말 ②
집에 오자마자 잠이 든 나는 총천연색 꿈을 꿨다. 우리 집 비둘기들 같은 오십여 마리 새들이 우리 집 마당을 흑백사진으로 찍어놓은 듯한 스산한 풍경 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살기등등해서 서로를 물어뜯던 새들이 핏방울들을 눈물처럼 흘리며 집을 떠났다. 일렬횡대로 날아가는 폼이 추운 나라로 떠나는 철새들 같기도 하고 불행의 전령사인 흉조들 같기도 했다.
그때 사위어가던 해가 새벽 해 마냥 선홍빛을 띠더니 사방으로 불길을 내뿜었다. 날개에 불이 붙자 그들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새들의 몸이 바다에 닿는 순간 수면이 중국집 프라이팬 속의 고추기름같이 지글지글 끓었다. 새들은 불새로 되살아나 내게 돌진해왔다. 나는 천식기 비슷한 고통을 느끼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고 생각할 때 누군가가 내 상체를 세차게 흔들었다.
“수형아, 수형아! 일어나. 일어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셋째 누나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부, 불이 났대. 전에 농촌지도소였던 건물에서”
“어디라구? 언제?”
“한참 됐어. 엄마 아버지도 거기루 가셨어. 지금쯤 불길이 다 잡혔을까? 우리, 구경 갈래?”
나는 누나를 뿌리치고 맨발로 달려 나가다 돌아와 운동화를 신었다. 나는 농촌지도소를 향해 달렸다. 확실히 내 안엔 불에 대해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는 어떤 상처가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땐 큰 불은 거의 잡혀 있었다. 밤의 시골 풍경과 대비되어 더 생뚱해 보이는 새빨간 형광빛 소방차와 그을린 채 물벼락을 맞은 건물,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이 검은 밤하늘 속에 어색하게 박혀 있었다. 펑퍼짐한 제복 때문에 더 둔해 보이는 소방수들이 큰 건물 뒤의 작은 건물과 그 주변의 전나무 숲으로 번진 불길들을 잡고 있었다.
요염하게 일렁이는 불길 속에서 사람들은 기괴해 보였다. 악마의 마을에 단체 여행이라도 다녀온 듯한, 곧 폭발해버릴 엄청난 감정을 품고 있는 그 얼굴들은 내가 알아온 얼굴들이 아니었다. 건물 가까이 가자 말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누가 밖에서 문을 잠갔을까? 숟가락을 걸어둔 걸 보면 틀림없이 장난기 많은 애들 짓인데.”
“애들 짓이겠지. 당연히 장난으로 했을 테고.”
“암, 장난이겠지. 장난이어야지.”
“정말 장난이었을까. 결과가 너무 끔찍하잖아. 밖으로 나가려고 얼마나 문을 두드려대며 몸부림을 쳤는지… 부녀
가 문가에서 꼭 끌어안은 채 죽어 있더래. 새까만 숯 껌댕이로. 아예 살과 뼈를 구분할 수 없었다던데. 얼마나 무서웠을까? 어휴, 그때 그 사람들 마음을 생각하면.”
“맞아. 사람이 죽어도 어떻게 그렇게 죽나?”
“그러게. 집도 절도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계집애는 열 살쯤 돼 보이던데.”
이곳에 도착해서 느낀 감정들이 이유 있는 것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이야기들을 듣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땅에 주저앉았다. 전신이, 입속의 이빨들까지 덜덜 떨렸다.
불행히도 나는 이 화재 사건에 연루됐을만한 아이들을 다 알고 있었다. 오후에 길에서 만난 종수 패거리와 문식이, 토미, 함평중 불량배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정말 그들은 떠돌이 거지 부녀가 농촌지도소 안에서 불에 타죽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까?
그때 전나무 숲 입구에 문식이와 은수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의 얼굴들은 말린 무화과 같았고 몸은 은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조금 더 떨다간 바짓가랑이 사이로 오줌을 쏟아낼 것 같았다. 나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큰 도로 건너편의 빈 상점들 뒤로 갔다.
내가 문식이의 어깨를 다독거려주자 그는 내용물을 비운 뒤 잠깐 떨다 균형을 잡는 저울같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자 내 침묵이 불편한지 묻지도 않은 비밀들을 토해냈다.
“조, 종수가 숟가락을 걸었어. 하지만 장난이었어. 집이 젤 가까운 은수에게 한 시간 뒤에 와서 벗겨주라고 했단 말야. 꼭 벗겨주라고. 세 번이나.”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차근차근 말해봐!”
“그런데 은수가 집에 가 있다 깜빡 잠이 들어버렸어. 잠 때문에 못 왔다구!”
“제발 처음부터 말해. 문은, 왜 밖에서 잠갔어?”
“종수가 재미삼아 그 남자애 같은 계집앨 놀렸어. 심하진 않았어. 그런데 그 계집애 성깔이 보통이 아니더라구. 욕을 퍼붓고 돌을 계속 던져대고. 종수가 제가 한 것의 다섯 배는 당했을 거야. 아이들 앞에서 낯선 계집애에게 수모를 당했는데 가만있을 수도 없잖아.”
“그럼 불은?”
“그건 몰라. 종수가 숟가락을 건 뒤 모두 집으로 돌아갔으니까. 저, 정말이야.”
“일단 돌아가자. 우리 셋이 사라진 걸 알면 의심받을 수도 있어.”
나는 다시 진동하는 문식이의 뺨을 슬쩍 쳤다. 잠시 후 그는 천칭같이 평온해졌다. 나는 그를 그 상태 그대로 고정시켜버리기 위해 두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사고 지점으로 돌아와보니 국면은 바뀌어 있었다. 마을 주민들 모두 형사 비슷한 존재가 되어 사고의 원인을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원 속의 무언가를 보며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었다.
원 속의 물건들은 내게 너무 익숙한 것들이었다. 빈 술병들과 담배꽁초, 담뱃갑, 썩기 시작한 과일 껍질, 그리고 발작적으로 찢겨진 포르노 잡지들… 한 남자 어른이 단호하고 신랄한 목소리로 중간 결론을 냈다.
“이런 짓을 하고 저런 걸 볼 만한 녀석들이면 제법 큰 놈들인데. 고등학생, 아니 최소한 중학생은 되겠네.”
그때 문식이가 딱총에 장전된 콩알처럼 원의 중심을 향해 튀어나갔다.
“어, 이 이거, 토미 시곈데”
늘 몸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가 트러블을 만드는 문식이는 계속 폭탄을 터뜨렸다.
“대장. 대장도 알지? 저 파란 가죽 줄. 토미가 즈이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다준 시계라고 뻐겼잖아. 자주 차진 않았지만, 분명히 봤잖아.”
닥쳐! 라고 외칠 수도 없는 나는 녀석의 손을 마구 꼬집었다. 그러나 이미 정서불안 상태에서 길을 잃어버린 녀석은 발을 구르며 한 말을 하고 또 했다. 나는 말리는 걸 포기하고 문식이의 손가락 끝을 봤다. 정말 토미의 시계와 똑같은 시계가 전지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결코 흔한 물건이 아닌 그 파란 가죽 줄 시계는 외계에서 떨어진 이상한 생물 같았다.
사람들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슬렁거렸다. 아무도 현장을 보지 않아서 누가 이 비극을 만들어냈는지 알 수 없지만 토미와 그의 그룹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물론 아이들이 떠난 뒤 만취한 어른이 아직 타고 있는 성냥이나 담배꽁초를 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오늘은, 최근 두 달 동안 비라곤 내린 적이 없어서 건조해질 대로 건조해진 봄밤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거, 꺼먼 뱀 같은 거”
사람들이 그의 손가락 끝으로 몰려갔다. 그곳엔 소방호스가 뿌린 물에 흠뻑 젖고 흙까지 묻어 지저분해진 검정색 띠가 있었다. 태권도복 상의에 둘러매는 검은 띠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토미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함평 경찰서 순경들도 토미라는 혼혈아의 신상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상했다. 누군가 토미라는 이름을 발설한 순간부터 사람들은 범인이 토미라고 믿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 토미가 문고리에 숟가락을 걸었다, 불을 질렀다, 라는 결론을 내놓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퍼즐 조각들을 짜맞추는 듯했다.
토미 혼자 이곳에 있었던 게 아님을 입증해주는 많은 물건들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었다. 듣다 보니 나중엔 토미가 범인이 아니라면 그것이 나쁜 일인 것 같았다. 왜?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했기 때문에.
(계속)